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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한인사회 기초를 닦은 사람들②]-하노이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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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회 작성일 25-05-08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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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 최봉식 구본수 고상구 한인회장 시기에 급성장
코참과 한베가정도 한인사회의 주요 축으로 부상해
하노이한인회가 들어서 있는 한빛타워하노이한인회가 들어서 있는 한빛타워

(하노이=월드코리안신문) 이종환 기자   

하노이대학 인근에 참빛타워가 들어선 것은 2010년이었다. 하노이 정도(定都) 1,000년에 맞춰 한국의 참빛그룹이 추진한 야심찬 프로젝트의 결실이었다. 호텔과 오피스텔, 상가로 이뤄진 이 대형 프로젝트는 당시 하노이 한인사회의 자긍심이기도 했다.

정도(定都)는 수도로 삼는다는 뜻이다. 서울은 한성백제 시절을 빼면, 조선 건국 3년째인 1394년 수도가 돼 지금 정도 630여 년에 이른다.

하노이한인회장을 지낸 고상구 세계한인총연합회(세한총연) 회장은 5월 1일부터 3일까지 하노이에서 ‘대륙별 한인회장 초청 역량강화 세미나’를 개최했다. 참빛타워의 일부를 이루는 하노이 그랜드플라자 호텔이 대회장이었다.

세계한인총연합회가 5월 1일부터 3일까지 베트남 하노이에서 ‘대륙별 회장단 초청 역량강화 세미나’를 열었다.세계한인총연합회가 5월 1일부터 3일까지 베트남 하노이에서 ‘대륙별 회장단 초청 역량강화 세미나’를 열었다.

한총연이 창립 4년 만에 해외에서 처음 치른 이 행사에는 미주총연의 서정일, 유럽총연의 김영기, 대양주총연의 나인출, 중남미총연의 백창기, 아프리카중동총연의 김점배 회장 등 대륙별 회장들이 참여해 향후 활동방향을 모색했다. 재일민단의 김이중 중앙단장도 업저버로 함께했으며, 이상덕 재외동포청장도 참여해 힘을 실었다. 기자도 이 행사를 현장 취재했다.

하노이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하노이한인회가 참빛타워로 사무실을 옮긴 것은 2012년이었다. 그이래 이곳은 하노이 한인사회 행사들이 열리는 중심지로 바뀌어 갔다. 그 후 인근 미딩 지역에 한국국제학교가 들어서고 대규모 코리아타운이 형성되면서 하노이한인사회는 더욱 확대됐다.

“하노이한국국제학교 학생수가 2,400명에 이릅니다. 초중고 과정이 개설돼 있는데, 지난해부터 한-베가정 학생수가 절반을 넘어섰어요.”

한국국제학교한국국제학교

김경록 하노이한국국제학교 이사장의 소개다. 한-베 가정은 부모 한쪽이 한국인인 집으로, 특히 아버지가 한국인인 경우가 많다.

베트남이 한국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신라 시대 최치원의 기록부터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베트남에 대한 기록들이 있으며, 교류도 이뤄진다. 한국의 화산이씨 집안은 베트남 왕자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하노이에 한인들이 본격 진출한 것은 1992년 한-베트남 수교 이후다. 베트남의 남북전쟁 시기, 한국군이 남베트남에 파병됐다. 애틀랜타의 김백규 회장, 쿠웨이트의 현봉철 회장처럼 해외한인사회에서도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많다. 하지만 한-베트남 교류는 1975년 ‘사이공 함락’과 함께 일시 단절됐다.

하노이에 한인회가 만들어진 것은 1993년이다. 초대회장은 주재원으로 파견된 포스코의 김광준 소장이었다. 그는 본사의 귀국 명령으로 10개월간 한인회장을 맡았지만, ‘하노이 교민 송년의 밤’을 재임 중에 개최했다.

왼쪽부터 김정인 최봉식 고상구 회장왼쪽부터 김정인 최봉식 고상구 회장

2대, 3대는 주재원 회장 시기였다. 대우그룹 주재원이었던 김경원 회장이 2대, KT 주재원인 박균철 회장이 3대 회장을 맡아 한인회를 이끌었다.

제4대 한인회는 고 이중열 회장이 이끌었다. 베트남 참전용사였던 그는 주재원으로 왔다가 IMF 시기에 독립해 한식당을 경영했다. 그는 ‘교민’으로 살던 2001년에 한인회장을 맡았다. 그가 운영하던 ‘인삼가든’ 식당은 교민 사랑방 역할을 했고, 불우이웃을 돕는 ‘작은사랑모임’도 만들어 운영했다.

제5·6대 한인회장을 맡은 김정인 회장은 하노이한인회를 반석에 올린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대우그룹 주재원으로 온 그는 재임 시에 한인회 사무실을 마련해 현판을 걸었다. 그는 재임 시 한국학교 설립추진위원회도 발족시켜 기금 모집에 나섰다. 이어 한국학교는 2012년 개교했고, 그는 초대 이사장도 맡았다.

한인회의 바통은 7, 8대 최봉식 회장, 9대 구본수 회장, 10~11대 고상구 회장으로 이어진다. 최봉식 회장은 한인회 회원 문호를 넓히는 한편 한인회 재정자립을 위해 노력했고, 섬유공학도 출신인 구본수 회장은 2011년 하노이한인회 사상 처음으로 경선을 통해 당선됐다. 구회장은 한인회 사무실을 참빛타워로 옮기면서, 제1회 한마음체육대회도 개최했다.

2017년에 열렸던 한베음식축제2017년에 열렸던 한베음식축제

10·11대 고상구 회장 시기는 하노이한인회 최전성기였다. 한국 대기업 협력사들의 진출은 물론, 섬유 봉제를 비롯한 기업들의 진출이 빠르게 늘어날 때였다. 한국식품 유통업을 크게 경영하는 고 회장은 한인들을 지원하는 119긴급콜센터, 도서실 운영, 문화강좌, 생활체육 동호회 지원 등으로 한인사회를 다져나갔다. 한베음식문화축제도 처음 개최했다. 이 행사는 매회 20~30만 명이 찾는 대형축제다.

12·13대 윤상호 회장 때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였다. 하노이 한인사회도 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는 백신을 구하기 위해 골몰했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으면서 재임시 추천이라는 논란을 빚기도 했다.

14대 장은숙 회장은 연임했으며, 올해 말로 임기가 끝난다. 그는 알뜰매장 ‘나누고 가게’ 운영, 한인상담센터 ‘위드센터’ 운영 등 새로운 사업을 시도했다. 하지만 한인회 비축기금과 정관개정 등을 둘러싸고 일부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노이한인회관 입구와 한인회 소식지하노이한인회관 입구와 한인회 소식지

한인회가 발간하는 월간 소식지는 그동안 한인회 재정을 지탱하는 화수분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코로나 시기를 겪고 또 SNS의 급속한 성장으로 이 소식지도 최근 많이 얇아졌다.

하노이 한인사회의 또 다른 축은 코참(한국상공인연합회)이다. 코로나 시기 이후 한인사회 위축과 한인회의 논란 등으로 코참이 다시 부각됐다. 코참은 1992년 출범해, 1999년 베트남 정부에 공식 등록했다. 그 이래 코참 디렉터리 발간, 경제세미나 개최, 장학금 수여 활동 등으로 입지를 다져왔다. 베트남 경제뉴스와 회원사 소식을 담은 ‘코참 데일리’도 발간하고 있다. 제9·10대 김정인 회장, 11·12대 류항하 회장, 13·14대 김한용 회장은 코참 전성기를 만든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한베가족협회도 한인사회의 중요한 축으로 이미 부상했다. 한베 가정 자녀들은 지난해 하노이한국국제학교의 2,400명 재학생의 절반을 넘어섰다. 이들 한베 가정에 대한 교육과 정체성 문제, 한인사회와의 화합 및 협력은 하노이 한인사회의 주요 현안의 하나로 떠올라 있다.

본 기사는 재외동포청에서 제작지원한 기사입니다

*위 내용과 관련해 윤상호 회장은 주베트남 대사관의 거듭된 요청으로 공적 신청을 했다고 밝혀왔습니다. 또  장은숙 하노이한인회장은 정관 수정은 정관위원회를 통해 이뤄졌으며, 수정 내용도 자구 수정에 그쳤다고 본지에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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