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1주년 특집 릴레이 인터뷰] ⑩ ‘아름다운 공동체’ 인니 한인회, 박재한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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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1회 작성일 24-08-29 09:59본문
[창간 21주년 특집 릴레이 인터뷰] ⑩ ‘아름다운 공동체’ 인니 한인회, 박재한 회장
도와주고,밀어주고,끌어주는 '도밀끌' 정신이 모범 한인회로 자리매김한 비결
재인도네시아 한인회 6대 회장, ‘한인 100년사’ 등 한인 발자취 기록으로 남겨
- 황복희 기자
- 입력 2024.08.28 19:16
- 수정 2024.08.28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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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 뿌리내린 700만 재외동포 사회의 지역별 구심체인 ‘한인회’는 현지 한인들이 고국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나누는 사랑방이자 현지 정부와 고국을 상대로 소통창구 역할을 하는 한인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하지만 이면에는 일부 지역에서 회원들간 갈등과 분열의 파열음 또한 적지않아 현지 한인사회는 물론 먼 고국에까지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기도 한다.
‘화합’과 ‘통합’의 가치는 대한민국 사회의 어젠다 이기도 하지만, 전세계에 흩어져있는 ‘한인 디아스포라’ 즉 각 나라의 한인사회가 대의(大義)를 위해 두팔 벌려 수용해야할 최우선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전세계 700만 한인사회에 모범이 될만한 한인회가 바로 '인도네시아 한인회'다. 한인 이주 100년의 역사를 가진 '인도네시아 한인회'는 1971년 출범, 53년의 한인회사(史)를 써내려가고 있다. 재인도네시아 한인회가 매달 발행하는 소식지 ‘한인뉴스’ 8월호가 338회차를 맞이한 점만 봐도 신구 세대가 바통을 주고받으며 한인 공동체를 잘 끌어오고 있는 증표라고 할 수 있다.
6대 회장직을 맡고있는 박재한 재인도네시아 한인회장을 지난 8월19일 자카르타 현지 한인회 사무실에서 만나 한인사회 안팎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공동체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는지 들어보았다. 재인도네시아 한인회는 현지 대한민국 대사관 바로 옆 영사동 건물 4층에 위치해 있어 보안카드를 소지한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갈 수 있었다.
▲ 영사관과 같은 건물을 쓰고 있는 점이 의외다.
- 사연이 있다. 현 재인도네시아 대사관 부지는 모국이 어렵던 시절인 지난 1974년 한인기업 10여개사가 기금을 모아서 사들여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한 것이다. 이어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인도네시아 한인학생들을 위해 기부한 장학금(5만달러)에다 현지 한인기업들이 한국학교 건립을 위해 37만5000달러를 모아 현 영사관 부지를 매입해 한국학교를 세웠다. 당시 한국학교가 법인이 아닌 관계로 대사관 이름을 빌려 부지 매입을 했다. 1993년 한국학교는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JIKS)로 법인화해 자카르타 근교로 이전하고, 이후 한국학교가 있던 건물 1층은 대사관 영사과, 2층은 한인회가 사용하다가 2013년 8월 새로 건물을 올려 지금의 영사동(5층 건물)을 준공했다. 한인회가 영사동 4층 건물을 쓰고 있는 데는 그런 오랜 배경이 있다.
▲ 박수덕 재인니 대리대사에 따르면 싱가포르, 일본, 프랑스 등 많은 나라에서 근무해보았지만, 인도네시아 한인회처럼 잘 운영되고 있는 곳을 보지 못했다고 전하더라.
- 인도네시아 한인들은 순수 이민을 목적으로 온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사업상 이주하거나 주재원으로 온 케이스다. 각자 개인사업들을 탄탄히 구축하면서 그같은 기반 위에 한인회와 지역 사회에 봉사 및 기부활동을 하는 분들이 많다.
인니 이주 1세대는 60년대 산림개발, 유전, 가스개발, 유연탄개발 등 자원개발 사업과 더불어 건설사업으로 진출했다. 그러다보니 40~50년된 다수의 한인기업들이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 인도네시아다. 60년대 목재가공업으로 진출한 코린도그룹을 예로 들면, 인도네시아 전체 합판의 4분의1에 해당하는 생산량으로 글로벌 합판 메이커로 자리매김하며 대기업 반열에 올라섰다. 승은호 코린도그룹 회장은 제3대 한인회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22년간 한인회를 이끌며 터를 잡아놓은 분이다.
이후 70년대 들어 제조업 등 노동집약 산업이 움트고 80년대 중반부터 신발, 봉제, 섬유, 완구 등의 사업이 본격 진출했다. 대표 한상 중 한 분인 송창근 KMK글로벌스포츠그룹 회장은 1988년 이곳 인니에 신발 제조회사를 설립해 나이키, 컨버스 등 세계적인 신발 브랜드의 OEM 회사로 키워 ‘미스터 신발왕’으로 불리운다. 아직까지도 이곳 바이어들은 봉제, 신발, 완구 제품에 있어선 한국기업이 가장 잘한다며 인정해주고 있다.
이외에도 인니 최대 가발 제조회사인 성창인도네시아 김영율 회장, 인니 전기밥솥 시장 점유율 1위의 용마일렉트로닉스 마용도 회장, 인니 전역에 한국식품을 전파해온 무궁화유통의 김우재·박은주 회장 부부, 미원 인도네시아 대표이사직을 역임하고 퇴직후 천연조미료 제조사를 창업해 탄탄한 입지를 굳힌 진영(PT. Jinyong)의 이진호 회장 등 큰 규모로 사업을 일군 한인기업인들이 받쳐주고 있는 것이 인니 한인사회의 특징이자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갈등의 소지가 없고 서로 다투는 일 또한 정말로 없다. 역대 한인사회 리더들이 터를 잘 닦아놓은 셈이다.
▲ 이곳 자카르타에 와보니 독립기념일(8월17일)을 축하하는 플랭카드가 곳곳에 붙어있다. 과거 우리 한인들이 인니 독립을 위해 현지인들과 함께 투쟁한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됐다. 인니 한인 이주 역사를 소개해달라.
- 일제강점기인 1920년 장윤원 선생이 일본 동경대 상과를 졸업하고 귀국해 은행 경영자로 재직하며 사재를 털어 독립자금을 지원하다가 일본경찰의 수배를 받고 이를 피해 중국을 거쳐 9월20일 당시 네덜란드령이던 동인도(인도네시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그는 자카르타에서 네덜란드 총독부의 일본어 통역반장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 이듬해 화교계 여성과 결혼해 2남3녀를 두었다. 1942년 인도네시아 자바를 통치하게 된 일본경찰에 의해 투옥됐다가 태평양전쟁이 끝난후 풀려났으나 앞서 일제에 의해 포로감시원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의 구명과 귀환 문제를 해결하느라 팔방으로 뛰다가 고문 후유증과 병마로 1947년 11월 자카르타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후손들은 모두 인도네시아에 훌륭하게 뿌리를 내려, 차남인 장순일 씨는 자카르타에 아뜨마자야대학교를 설립해 공대학장을 지냈다.
물론 장윤원 선생 이전에도 인삼을 팔러 한인들이 이곳에 오기도 했으나, 가정을 이루고 산 것을 한인 이주의 첫 시점으로 잡아서, 장윤원 선생이 첫 발을 디딘 1920년을 기준으로 지난 2020년에 한인이주 100주년을 기념하고 9월20일을 한인의날로 정해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또 이곳 서부자바주 가룻군에 가면 조선인의 이름을 딴 ‘양칠성 거리’라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일본에게서 독립한후 1945년 9월부터 1949년 12월까지 네덜란드를 상대로 다시 독립전쟁을 벌였다. 양칠성 씨는 일본군 군속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일하다가 일본이 패망한후 동료 8명과 함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며 맹활약을 벌이다가 1949년 생포돼 공개 총살이 됐는데, 인도네시아에선 외국인 독립영웅으로 추서가 됐다. 그가 이끈 유격대의 기지가 있던 마을의 한 도로를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는 우리 한인들의 눈물과 한(恨), 땀방울이 배인 곳이다. 이같은 인니 한인의 역사를 배우고 되새기고자 아이들 35명을 인솔해 8월27~28일 역사탐방을 떠난다.
▲ 올해 연말 한인회장으로서 연임 임기가 끝난다. 지난 5년여를 정리한다면.
- 한인회장은 봉사하는 자리다. 그같은 책무를 잘 수행하려면 우선적으로 본인 사업이 자리를 잡고 있어야한다. 자기 사업이 잘 돼야 봉사도 할 수 있는거다. 그런 의미에서 전임 회장들께서 터를 잘 잡아놓아 이를 승계해 회장직을 순조롭게 수행할 수 있었다. 우리 한인들이 인니에 이주한지 올해로 104년을 맞았다. 그같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인니 한인들의 발자취를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2019년 3월 한인회장에 취임하면서 그들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지난 2020년 인니 이주 100주년을 기념해 한인회 차원에서 한인과 한인기업의 성공사를 담은 ‘오랑 꼬레아의 100년(1920~2020) :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510p 분량)를 발간한 것이 대표적이다. (오랑 꼬레아는 인니어로 한국인이라는 뜻이다.)
2년 가량의 준비기간이 소요됐는데, 앞으로 한인이주 150년, 200년사를 쓸 때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 2023년은 대한민국과 인도네시아가 수교한지 50주년이 되는 해로서, 한-인니 수교 50주년 기념 책자를 인도네시아어로 발간했다.
임기 중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우리 교민사회 또한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대사관 및 한국 정부와 협력해 대처를 잘한 점도 돌이켜보면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무엇보다 우리 한인회는 대사관과의 관계를 잘 끌어오고 있는 점이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고 싶다.
▲ 코로나를 거치면서 교민 수가 많이 줄었다고 들었다.
- 대략 5만명 정도 되던 교민 수가 지금은 3만명도 안된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팬데믹 시기에 이곳 교민들도 많은 수가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요즘들어 조금씩 다시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 2월 총선 때는 한인 변호사인 김종성 씨가 자카르타 선거구에 출마해 고배를 마시긴 했으나 현지인들의 큰 호응을 받는 의미있는 성과를 거둔 일도 있었다. 인니 한인 역사로 봐서 정치 쪽에서 인물이 나온 것은 시기적으로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이번에 발판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인니는 옆 인도와 함께 동남아 시장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 진출하려는 한인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 이곳 또한 과거에 비해 인건비가 오르긴 했으나 아직도 저렴한 편이다. 또 지역적으로 편차가 심해 지방으로 가면 자카르타 임금수준의 절반이 안된다. 따라서 아직도 다양한 업종에 걸쳐 수출을 겨냥한 제조업 쪽이 유리하다고 본다. 또 2억8000만 명 인구대국인 만큼 내수 소비시장을 바라보고 각종 소비재, 다음으로 서비스업을 추천하고 싶다.
현재 인니 시장에 대기업은 거의 다 들어와있다고 보면 되는데, 현대자동차는 진출한지 2년만에 전기차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전기차나 전기 오토바이 같은 업종은 환경 문제 때문에 정부 지원을 해주는 점도 참고할만하다.
박재한 회장은 계명대 일본학과(81학번)를 졸업하고 국내 봉제회사에 입사해 1992년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1997년 봉제회사 BPG를 창업, 인도네시아 한국봉제협의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2013년 4성급 호텔인 자바팔레스를 설립하고, 2017년에는 물류창고 회사인 BPG LOGISTIC을 세웠으며, 이어 전기오토바이 사업을 추가하는 등 30여년간 활발한 기업활동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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