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윤칼럼] 이모 전략 – 동남아시아에서 배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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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5-10-10 14:33본문
소설 <우동 한 그릇>을 처음 읽었을 때, 마음 한켠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난한 손님에게 우동집 주인은 말없이 다가가, 한 그릇 값만 받지만 두 그릇의 정성을 담은 우동을 내어준다. 그 배려는 소란스럽지 않다. 오히려 조용하고, 계산적이지 않으며, 상대의 체면을 지켜주는 잔잔한 배려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진짜 도움’은 소리 없는 온기에서 온다는 사실을 배웠다.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거창한 구호보다 조용한 도움이 더 필요한 시대다. 머리를 한 번 쥐어박고 길을 가르치는 사람보다, 옆자리에 앉아 조용히 국물을 나눠주는 사람이 더 절실하다. 이제 사람들은 강요나 지시보다, 부담 없이 다가올 수 있는 온도를 찾는다. 그 온도를 나는 ‘이모 전략’이라고 이름 붙여봤다.
오랜 시간 캄보디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나는 종종 ‘도움’이 관계를 무너뜨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선의로 시작된 지원이 어느새 우월감으로 변하고, ‘이만큼 해줬으니 너도 이만큼 해야 한다’는 계산이 관계를 차갑게 만들었다. 얼마나 어렵게 모은 돈으로 유학을 보내 줬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박사급에 맞는 급여를 달라고 한다고 배신을 당했다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을 봤다. 그때 깨달았다. 이 지역에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강압적인 선의라는 것을.
캄보디아에 유행하던 언어가 있었다. 그들은 ‘필요한 것’은 구걸하고, ‘원하는 것’은 스스로 산다는 것이다. 월급 250달러 받으면서 엄마 약값이 없다고 애걸하던 직원이 아이폰 최신형을 사 들고 왔다는 이야기는 한국인들을 의아해하게 만들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화내거나 가르치려 들지 말고 그 선택의 자유를 빼앗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필요를 대신 판단하려 들지 말고, 그들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그 잔잔한 기다림이야말로 진짜 관계의 시작이다.
나는 이런 인간관계를 ‘이모 전략’이라 부른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관점의 접근이 필요해서 전략이라고 붙였다. 부모가 필요한 것을 챙겨주는 존재라면, 이모는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사람이다. 조카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주고, 힘들어 보일 때 옆자리를 내어주는 존재. 이모는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함께 웃고, 함께 실패한다. 무엇보다, 기대하지 않는다.
동남아시아에서 20년 넘게 살면서 나는 이 ‘이모의 마음’을 배웠다. 이곳에서는 우월감이 통하지 않고, 강요가 관계를 망친다. 자랑보다는 공감이, 지도보다는 인내가 통한다.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 그들의 방식대로 곁을 내어주는 것이야말로 이 문화권에서 가장 따뜻하고 현명한 태도다. 오랜 식민 통치와 전쟁을 겪어온 민족이라 외국인의 강압적 태도에 반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모 전략의 완성은 떠날 때에 드러난다.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내가 사라진 뒤에도 그들의 기억 속에 “조용히 곁을 내어주던 사람”으로 남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우동 한 그릇>의 주인공처럼, 겉으로는 한 그릇만 내어주지만, 그 속에 마음 두 그릇을 담아낼 수 있다면 그 잔잔한 온기가 결국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된다. 거창한 도움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필자소개(김대윤)
캄보디아 화장품협회(CCA) 고문
캄보디아에서 왕립법률경제대학교 대학원(사법 전공)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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