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종범의 ‘글로벌 한민족 진출사’ ⑤...베트남전쟁 특수와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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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4-11-20 09:50본문
[기고] 문종범의 ‘글로벌 한민족 진출사’ ⑤...베트남전쟁 특수와 한국경제
경영학 박사, 전 건국대 교수, 베트남 K-Food 사장
- 재외동포신문
- 입력 2024.11.19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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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10여 년간 한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다 IT기업에서 싱가포르, 베트남 법인을 설립했고, 한국 딸기 품종을 미국으로 가져가 최초로 미국농림부에 종자보호권을 등록하며 4년간 캘리포니아에서 직접 딸기 농사를 지었다. 2024년 10월부터 1만여 한국업체가 진출해 있는 기회의 땅 베트남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현대판 노마드(Nomad, 유목민)로 세계를 다니며 직접 접하고 느낀 한민족 글로벌 진출 이야기를 재외동포신문에 연재한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가수 김추자의 노래가사다. 당시 베트남은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머나먼 외국이었을 것이다. 지금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나라인 베트남에는 15만명의 한국 교민과 1만여 한국 기업들이 있다. 하노이의 미딩과 호치민의 푸미흥은 한글 간판이 가득한 한인타운이고, 다낭은 경기도 다낭시라 불릴만큼 한국 사람이 많이 찾는 관광지다. 이 곳들뿐만 아니라 북부 사파에서 남쪽 끝단의 섬 푸꾸억까지 베트남 전역에 한국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동쪽으로 40km를 가면 베트남 수출경제의 심장이라 불리는 박닌성이 나온다. 이 곳에는 삼성전자의 갤럭시 스마트 폰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다. 아침이면 17만명의 근로자가 출근을 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는데, 통근 버스만 해도 900여대로 하노이시의 전체 시내버스 숫자보다 많다고 한다. 베트남 삼성전자의 수출액이 베트남 전체 수출의 25%를 차지하기도 했으니, 삼성전자는 베트남 경제의 큰 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외에도 수 많은 한국 기업들이 베트남에서 활약하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영어를 할 줄 알면 월급이 두 배, 한국어를 할 줄 알면 월급이 세 배"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베트남 대학교에서 영어과보다 한국어과의 커트라인이 더 높다고 하니, 베트남에서 한국의 위상과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박항서 감독과 K-Pop, K-Food 등으로 한국과 한류의 열풍이 식지 않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은 베트남이라고 하면 베트남 전쟁으로 기억되는 나라였다. 베트남 전쟁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 이후 분단되었던 베트남에서 1955년 11월 1일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벌어진 전쟁으로 분단된 남북 베트남 간의 내전이자, 냉전시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리전 양상을 띤 전쟁이었다. 1964년 8월에서 1973년 3월까지는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했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로까지 전선이 확대된 국제전으로 치뤄졌다.
한국은 1964년 9월 의무대와 태권도 교관단 등 비전투병력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5만 병력의 한국군(누계 30만)이 참전해 1965년에서 1973년까지 8년간 56만여건의 작전을 수행했다. 이 전쟁으로 5000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하는 등 한국군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러한 희생과 젊은 이들의 피는 한국의 근대화에 큰 기여를 했다.
이 전쟁으로 당시 1인당 GDP가 100달러 미만이었던 한국에 50억 달러에 해당하는 거액의 외화가 들어오게 됐다. 그 내역을 보면, 한국군의 현대화와 관련된 미국의 군사원조(1965~1974년)가 16.4억 달러, 파병한국군의 수당 및 경비가 5.46억 달러, 한국 기업이 참여한 전쟁 관련 수입이 10.36억 달러, 한국에 제공된 차관이 20억달러였다. 1965년 대일 청구권 자금이 8억 달러였으니, 실로 엄청난 규모의 외화 유입이었다.
미국 국방성 군사박물관에는 베트남 전쟁에서 한진 기업의 기여를 기념하는 총기 수송 과정을 그린 그림이 있다(아래). 미국 국가 기록원의 자료에 따르면 한진 기업은 1965년에서 1974년 사이 미군 해외 발전사업에서 총 1억1357만8000 달러를 벌어들였다. 한진 기업 뿐만 아니라 현대건설도 주한미군 사업들을 통해 형성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사업정보를 얻어 파타니-나리티왓 고속도로 사업을 수주했다. 이 고속도로는 동남아 주둔 미군의 활동범위 확장을 위해 IBRD 차관으로 태국이 발주한 98km 길이의 4차선 고속도로 공사였다. 현대건설이 베트남전 관련 미군 해외조달사업에 참여하게 된 것은 한국정부가 브라운각서를 미국과 합의했고, 정주영 회장의 동생 정인영이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통역관과 미8군 공병감실에서 근무한 경력 덕이었다.
그리고 현대건설과 주한미군의 관계가 돈독해진 계기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국전쟁 기간 중이던 1952년 겨울,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한해 부산에 있는 유엔묘지를 방문할 계획이었다. 미군은 묘지 단장을 하며 잔디를 입히려 했지만 한국의 추운 겨울 날씨로 불가능했다. 이에 현대건설에서는 보리를 심어 묘지를 푸르게 했다는 일화다.
한진 기업과 현대건설 외에도 여러 한국 기업들이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외화를 벌어들였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한국군과 한국 기업이 벌어들인 돈은 한국 산업화의 밑천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우리의 앞 세대들이 피를 흘리며 목숨을 걸었던 이곳 베트남에서 이제는 우리의 기술과 땀으로 생산기지를 구축하고 한국의 경제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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