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노마드’ 한상, 하경서의 자유 그리고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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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6-04-27 09:56본문
‘글로벌 노마드’ 한상, 하경서의 자유 그리고 꿈
30년 중미(中美) 개척…봉제공장 인수로 시작한 ‘3억달러 기업가’ 여정
“지금은 불이 난 상황”…중동발 위기 속 기회 읽는 생존 전략
“한상은 명예 아닌 봉사”…네트워크·차세대 향한 리더십 제언
쿠바·북한까지 시선…사업 넘어 ‘봉사와 확장’ 향한 다음 꿈
- 황복희 기자
- 입력 2026.04.20 18:46
- 수정 2026.04.21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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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에서 31년째 섬유업 등 사업을 운영하며 나눔과 기부를 최고의 덕목으로 실천해온 하경서 카이사 그룹 회장이 지난 4월13일 서울 여의도 재외동포신문을 방문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황복희 기자] 예순넷 장년의 나이인데도 작은 귀고리와 손등의 문신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생각을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태도에는 먼 데서 온 ‘자유’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가 모든 걸 잃은 걸 알고도 실패에 묶이지 않고 크레타섬 해변에서 춤을 춘 것처럼, 이 사람 또한 머나먼 타국에서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많다고 했지만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할 것 같았다. ‘자유로운 영혼’의 표상인 조르바처럼.
하경서 카이사(CAISA)그룹 회장. 중미(中美) 엘살바도르를 기점으로 과테말라, 니카라과, 온두라스, 지금은 베트남까지 섬유업을 주요 사업으로 3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열살 때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가 봉제공장을 하던 어머니를 돕다가 대학졸업후 운영을 맡았고, 90년대초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미국 봉제업이 위기에 처하자 1994년 엘살바도르에서 부도가 난 봉제공장을 인수하며 중미에서 기반을 다졌다.
지난 13일 여의도 본지를 방문한 하 회장은 엘살바도르 상황부터 중동전쟁, 사업 및 개인사, 한상네트워크, 차세대, 나눔과 봉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걸쳐 주저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다음은 하 회장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구성했다.
▲엘살바도르에 들어가신지 올해로 31년째다. 어떤 나라인가.
“작지만 한국과 닮은 나라입니다. 격렬한 내전을 겪었고, 자원이 풍부하지 않아 사람과 네트워크가 중요한 나라라는 점. 그리고 국민들이 부지런하다는 점이 닮은 지점입니다. 80년대 12년간 내전을 치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유럽, 일본 등지로 떠나 전세계로 퍼졌습니다. 현재 약 600만 인구 외에 해외 이주민이 250만명 정도 됩니다. 이들이 미국 등지에서 보내오는 달러가 쌓이면서 2001년부터 달러화를 도입하게 된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해외서 배운 선진 노하우를 토대로 지금의 발전을 이루었어요.
중남미에서 세 나라가 달러를 쓰는데 엘살바도르 외에 파나마와 에콰도르입니다. 달러로 경제를 움직이니까 금리와 물가가 상대적으로 안정돼 있습니다. 커피와 설탕, 섬유 그리고 서핑이 유명하며,세계 최초로(2021년)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채택했는데 실제로 많이 쓰이지는 않습니다.”
▲현지에서 오랜기간 나눔과 봉사를 해오신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업도 결국엔 돈을 벌고 은퇴하는 생애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그 좋은 자리에서 ‘무엇을 더했느냐’(Add value)라고 생각합니다. 학생이 공부하고 졸업해 취업, 결혼, 은퇴의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사업도 결국 한 생애의 경로일 뿐이지만, 그 사이에 봉사와 기여, 사람을 위한 일을 얼마나 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좋은 일을 해야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래서 사업의 성패 보다 공동체에 대한 기여가 더 오래 남는다고 여깁니다.
힘이 있을 때, 건강할 때, 돈이 조금 있을 때 사회에 골고루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마치 빵(인생)에 ‘빠다’(버터, 나눔)를 골고루 바르는 것처럼 말이죠. 아마도 과거 힘든 걸 겪었기 때문에 봉사를 하는 것이지 싶어요. 기부라는 게 돈이 줄어드는게 아닙니다. 더 큰 걸 남겨요. 기부는 회사 구성원들이 함께 만든 성과를 사회와 나누는 것이지, 혼자서 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그래서 이름을 앞세우기 보다 조용히 움직입니다. 저는 기부할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
빵에 빠다(버터)를 골고루 바르는 것처럼 회사 구성원들과 함께 만든 성과를 사회와 골고루 나누고 싶다고 말하는 하경서 회장. ▲섬유를 중심으로 포장재, 커피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연 3억 달러(약 4400억원) 매출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안다.
“요즘 중소기업은 하나만 알아선 무너집니다. 과거처럼 제품 하나만 잘 만들면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원재료, 공급망, 전쟁, 지정학, 유가, FTA, 환율... 거미줄처럼 얽힌 외부 변수까지 함께 읽어야 살아남습니다. 오픈된 정보와 뉴스를 조합해 한 달 먼저 움직이면 3개월, 6개월을 앞설 수 있어요. 특히 중동전쟁 등 요즘같이 공급망이 불안할땐 종이와 부자재를 미리 사두는 등 공급 차질이 생기기 전에 앞서 움직이는게 중요합니다.
유가가 일정 수준 이상 오르면 소비가 급격히 위축되고, 의류, 자동차, 외식, 호텔 등 비필수 소비가 먼저 타격을 받습니다.
큰 회사는 몸집이 커서 빨리 움직이기 어려우니, 위기 국면에선 중소기업이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어요. ‘블랙스완’이나 급격한 지정학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기회가 생긴다고 봅니다. 전 세계를 봐야 해요. 다 연결돼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지금 불이 났는데 사람들은 연기만 보고 있어요. 저는 불이 났다고 봐요. (하 회장은 중동전쟁이 난 현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K컬처, K푸드 등 K파워가 단군 이래 최강이라고 한다. 해외에서 느끼기에 어떤가.
“한국 또한 유대인의 길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초기 유대 이민자들이 생업에 매달리다 다음 세대가 전문직으로 진출하고, 이후 금융·엔터테인먼트 등으로 확장되는 흐름을 보였는데, 한국 역시 그러한 전철을 거쳐 K팝과 엔터테인먼트, 글로벌 문화산업으로 확장하고 있어요. 다만, 오늘의 K콘텐츠와 K컬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60년대, 70, 80년대 떠난 재외동포들이 현지인들에게 불고기, 김밥, 김치, 라면을 함께 나누며 한국 문화를 스며들게 했고, 그 오랜 시간의 축적 위에서 오늘의 K파워가 나왔다는 인식입니다.
그런 면에서 재외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대한민국의 민간 외교관이자 소프트파워 앰배서더(대사)라고 할 수 있어요.”
▲한상들로 구성된 사회공헌재단인 글로벌한상드림 장학회에 최근까지 14억원을 기부해 고액 기부자로 등재돼 있기도 하다. 한상에서 하 회장께서 차지하는 포지션이 크다.
“한상 리더십은 명예가 아니라 봉사여야 해요. 훈장, 직함,‘금딱지’보다 실제로 한상이든 공동체든 이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가 더 남습니다.‘명예’보다 (그가 한)‘일’이 기억되는 법이니까요. 행사에 참석해보면, 멀리서 비행기 타고 와서 사진만 찍고 어려운 사안은 내년으로 넘기곤 하는데, 사실상 이런 게 불만입니다. 당장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결정하고, 나이든 리더들이 힘 있을 때 ‘도장’을 찍어줘야 다음 세대가 수월해진다고 봅니다.
또 하나, 한상의 가장 큰 자산은 ‘네트워킹’입니다. 사업 뿐아니라 정치, 문화, 현지 사회 연결까지 결국엔 네트워크가 모든 것의 기반이며, 대한민국 같은 글로벌 통상국가에는 특히 중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한상을 잘 쓰다듬고 키워주면 소프트파워도 되지만 대한민국의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엘살바도르 한인회장을 지냈고 현재 한글학교 교장인 하경서 회장이 글쓰기 대회 수상자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하경서 회장 제공] ▲한상들의 최대 행사인 세계한상대회가 올해로 24회를 맞이한다. 1세대가 점점 연세도 많아지고 2, 3세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약간의 혼란도 없지 않다. 어떻게 극복해야할까.
“차세대, 2세, 3세로 확장해야 한다고 봐요. 한국어 중심 행사는 2세, 3세에게는 장벽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AI 통역을 활용해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등 다중언어로 운영하고, 덧붙여 국제적인 스피커 초청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상대회에 지금보다 더 수준높은 ‘키노트 스피커’(기조 강연자)를 초청하자는 겁니다. 삼성, 현대 등 대기업 CEO나 세계적 연사들이 35분 강연, 15~20분 Q&A 형태로 참여하면 행사 수준이 크게 높아질 수 있다는 취지입니다.
나아가 한상대회를 단순 친목 행사 성격에서 벗어나 글로벌 비즈니스와 정치, 기술 담론이 교차하는 ‘한상 다보스’로 키우는 방안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나이에 이민을 떠나셨다. 어떤 기억을 갖고 있나.
“사실 좋은 기억 보다 나쁜 기억이 더 많습니다. 부모님 두 분 다 아직 살아계신데, 이민을 오시기 전에 어머니가 이화여대 법대를, 아버지는 공군사관학교 출신이셨어요. 미국에 오시자마자 이혼을 하셨고, 어머니는 영어를 배우느냐, 아이들을 먹여살리느냐 선택을 해야했어요. 당시 어머니는 생계를 선택하셨고 첫날 봉제공장에서 하루 16시간을 일하고 1달러를 받아오셨죠. 그런데 점점 속도가 붙더니 6개월이 지나자 일주일에 1000달러를 벌게 됐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작은 봉제공장을 시작하셨어요. 저 또한 어머니를 거들면서 그 공장에서 자럈습니다. 10대에 영어가 되니까 노동청, 세무서 같은데 어머니가 불려가시면 제가 대신 ‘네고’를 했어요. 처음에는 100달러를 내라고 하던 관청이 우리쪽에서 시간을 끌자 6개월후 3달러로 해결이 되더군요. 그때 ‘아! 이게 네고, 즉 비즈니스구나’ 하고 배웠지요. 그래서 저는 무서운 게 하나도 없어요.”
▲엘살바도르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다른 중미 국가에 이어 베트남까지 진출하셨다. 한상들 가운데 보기드문 경우다. 다국적으로 운영을 하시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한상대회 관계자 한 분이 제게 ‘평생 일자리만 있으면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한마디로 ‘글로벌 노마드’입니다. ‘밥그릇’이 글로블하면 좋잖아요. 리스크를 줄이는 요인도 되고. 선배 한상들을 보면 한 나라에 가서 거기서 은퇴하거나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저는 한국으로 돌아올 마음은 없어요. 마지막은 쿠바나 북한에 가고 싶어요. 베트남에 투자한 이유가 돈 벌러 간게 아니라 공산체제를 배우러 간 거에요. 그래야 쿠바나 북한에 가니까요. 공산당의 나라에서 뭘 배웠냐, ‘다 불가능하거나 다 가능하다’ 즉 ‘안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다’는 거에요. 당(黨) 말만 들이대면 다 문이 열려요. 간단하죠. 사업하기가 너무 편해요.
그렇다면 왜 하필 쿠바와 북한인가. 쿠바는 1959년 혁명 이후 지난 70년간 거의 닫혀 있던 나라였어요. 사업가 시각에서 할 게 너무 많은 블루오션인거죠. 이에 비해 북한은 사업 보다는 봉사의 미션이 더 강해요. 독립운동가들이 둘로 나뉜 한반도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소설 속 ‘조르바’는 이렇게 외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하경서 회장, 그도 충분히 힘든 일들을 겪었기에 “무서울게 없다”고 했다. “너무 작전을 짜는 것 보다 움직이는 게 낫다”는 말도 했다. 조르바 또한 이렇게 말한다.
“말이 너무 많아. 사람은 춤춰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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