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255] 보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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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6-04-27 09:46본문
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보부상이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상은 봇짐장수를, 부상은 등짐장수를 가리키는 말로 합해서 보부상이라 부른다. 조선시대 이리저리 지방을 떠돌며 물건을 팔아 살아가던 사람들을 합쳐서 보부상이라 칭했다.
새우젓 사려, 조개젓 사려, 초봄에 담은 쌀새우는 세하젓이요, 이월 오사리는 오젓이요. 오뉴월에 담은 젓은 육젓이요, 갈에 담은 젓은 추젓이오. 겨울 산새우는 동백젓이오.(보부상의 새우젓 타령)
담바고를 사시오. 담바고. 평양에는 일초요, 강원도라 영월초요, 평안 성천의 서초요, 입맛나는 대로 들여가시오.(부상의 담바고 타령)
보상은 비단, 금은으로 만든 세공품, 필묵, 피혁과 같은 고가품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다녔고, 부상은 생선, 소금, 나무 제품, 토기 등 비교적 저렴하고 부피가 큰 물건을 지게에 지고 다녔다. 도로가 발달되어 있지 않아 상품의 유통이 어렵던 시대에 꼭 필요한 직업인들이었다. 이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고, 5일장이 생겨난 뒤로는 장날에 맞추어 순회하는 장돌뱅이가 되었다. 매매 알선과 금융, 숙박업 등을 하던 객주(客主)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구분과 차별이 뚜렷하던 시대에 제대로 된 사람대접을 받기 어려운 직업이었던데다, 자본도 없었기에 더욱 천대를 받았다. 사정이 어려웠던 만큼 그들은 동료를 모으고 계(契)를 만들어 끈끈한 조직을 스스로 만들었다. 보부상단은 읍내에 가게를 차리고 보부상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였다. 장터가 서고 장이 열리면 흥정꾼을 고용하기도 했다.
보상과 부상은 각각의 상단(商團)으로 나뉘어 있었고 취급하는 물품도 구분하여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상단은 군현을 묶은 관할마다 임소(任所)를 두고 그 우두머리는 본방(本房)을 선출하여 사무를 맡았다. 또한 본방 중에서 접장(接長)을, 접장 중에서 도접장(都接長)을 선출해 8도를 통할하는 전국적인 조직을 이뤘다. 이들은 이름과 취급상품, 거주지 등이 적힌 신분증을 발급했고 세금도 납부했다. 혼자는 약하지만 조직을 이루어 강해진 이들은 탐관오리나 폭력배들의 횡포에 공동으로 대응했다.
탄탄한 조직력과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뭉친 부부상은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도왔고, 성실히 임하되 같은 소속임을 잊지 않았다. 객지에서 병이 들거나 객사(客死)하면 일면식이 없어도 도움이 되어 장사를 지내주기도 했다. 특히 조직을 위협하고 상도덕을 어지럽히는 행위에는 곤장을 때리고 벌금을 내게 했다. 그 규칙이 엄하여 사건에 따라 적게는 10대, 최대 50대를 맞았다. 본방 어른을 속이거나 부모에게 불효한 것에 엄했다. 혼인이나 장례에 내는 부조의 품목과 수량도 따로 정해져 있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헤어질 때는 저고리를 바꿔 입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보부상들은 몸에 맞는 옷을 입는 이가 드물었다. 1894년 전국의 보부상 수는 25만명 정도로 추산됐지만, 길이 잘 닦이고 유통이 근대화되면서 이들은 사라져갔다. 이들의 생활과 애환을 기록한 장편소설이 김주영의 『객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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