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영어 AI독점과 한국어 디지털 주권’, 국가 전략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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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5-08-06 10:09본문
[기고]‘영어 AI독점과 한국어 디지털 주권’, 국가 전략이 시급하다
허준혁 유엔피스코 사무총장
- 재외동포신문
- 입력 2025.08.05 13:42
- 수정 2025.08.0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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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혁명의 본질은 ‘언어’
AI 혁명은 산업, 경제, 교육, 문화 전반을 재편하며 인간의 삶을 근본부터 흔들고 있다. 이 변화의 가장 중심에는 ‘언어’가 있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와 인식, 문화 전승의 핵심 도구다.
그러나 이제 그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AI(인공지능)로 이동하고 있다. AI는 인간의 언어를 학습해 이해하고, 스스로 글을 쓰며, 때로는 인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사고한다. 문제는 이 변화를 주도하는 언어가 ‘영어’라는 점이다.
영어 중심 AI 생태계의 구조적 불평등
구글(Gemini), 오픈AI(GPT), 메타(Llama)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주도하는 초거대 언어모델(LLM, Large Language Model)의 80% 이상은 영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된다. 인터넷 문서, 학술 논문, SNS, 미디어 등 주요 말뭉치 대부분이 영어로 축적돼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AI의 ‘모국어’는 영어이며, AI가 세상을 해석하고 사고하는 기본 틀도 영어식 세계관에 맞춰져 있다.
이 과정에서 비영어권 사용자는 두 겹의 불평등에 직면한다. 첫째, 한국어를 비롯한 비영어권 언어는 번역을 거친 2차 데이터로만 학습되어 품질이 저하된다.
둘째, AI의 판단과 응답은 영어식 논리와 문화 코드에 기반해 생성되므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조차 영어의 사고 틀을 강요받게 된다. 언어의 편향은 단순한 기술적 문제를 넘어 문화적·정체성적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교육, 행정, 법률, 외교 등 사회 전 영역에서 이 불균형은 점점 더 심화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주권의 핵심은 ‘언어 주권’
디지털 주권(Digital Sovereignty)은 흔히 데이터 서버의 위치나 기술 소유 여부로 논의되지만, 진정한 본질은 ‘언어 주권’이다. 언어는 사고와 문화의 토대이며,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자산이다. 한국어의 디지털 주권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미래 기술 환경에서 자율성과 독립성을 잃고 타자의 언어 체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AI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은 '말뭉치(corpus)'다. 이는 AI가 학습하는 방대한 언어 데이터베이스로, 양과 질의 격차가 곧 기술력의 격차로 직결된다. 영어권은 수십억 건 이상의 말뭉치로 AI 모델을 고도화하고 있지만, 한국어는 양과 다양성 모두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특히 구어, 방언, 전문 용어 영역은 심각하게 결핍돼 있어 맥락 이해와 표현력이 제한된다. 문자 체계의 우수성만으로는 AI 경쟁력을 담보할 수 없다. 데이터 없이는 기술도, 주권도 없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과 ‘공정한 기회’
1446년, 세종대왕은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당시 백성은 한자를 몰라 억울함을 호소할 길조차 없었다.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쉽게 배우도록” 한글을 만들었고, 이는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곧 권력이던 시대에 모든 백성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한 혁명이었다.
6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새로운 언어 불평등에 직면해 있다. 이번에는 인간이 아니라 AI가 우리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 글자를 만들었다면, 오늘 우리는 AI 시대를 위해 ‘한국어의 미래’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과거의 혁신이 문자 창제였다면, 오늘의 혁신은 '언어의 재탄생'이다.
국가 전략으로 대응해야 한다
한국어의 디지털 주권 확보는 기술 개발 차원의 과제가 아니라 국가 생존과 직결되는 전략 과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국가적 대응이 시급하다.
1. 초대형 한국어 '말뭉치' 구축
한국어 AI의 가장 큰 과제는 말뭉치 격차다. 한국어 말뭉치는 절대적 규모에서 부족할 뿐 아니라, 다양성 측면에서도 심각한 편차를 보인다.
일상 대화, 지역 방언, 전문 분야 언어가 제대로 축적되지 않아 AI는 맥락과 뉘앙스를 파악하는 데 한계를 드러낸다. 이 격차가 방치된다면 한국어는 디지털 세계에서 주변 언어로 고착될 위험이 크다.
방언·전문어·구어를 포괄하는 대규모 한국어 데이터를 공공·민간 협력으로 확보하고,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개방형 플랫폼으로 제공해야 한다. 데이터 표준화와 품질 검증 체계를 마련해 AI 편향을 최소화해야 한다.
2. AI 한국어 표준화 연구소 설립
음운·형태소 규칙을 AI 모델에 최적화하는 연구를 추진하고, 국제 표준 경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 한국어의 디지털 표준을 선도하는 것은 기술적 자립의 핵심 기반이 될 것이다.
3. 공공 서비스 한국어 AI 모델 우선 도입
행정·교육·법률 등 공공 영역에서 한국어 AI 모델을 우선 도입하고, 외래어 남용을 줄여 국민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공공언어 환경을 구축해야 한다.
4. 글로벌 확산 전략
국내 한글단체에 대한 집중 투자와 함께 세계 각지의 세종학당과 한글학교, 한인단체 네트워크와 K-콘텐츠를 연계해 AI 기반 한국어 학습 플랫폼을 개발하고, 한국어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야 한다. 이는 경제·문화 외교의 핵심 자산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글의 600년, AI의 100년
앞으로의 100년은 AI가 인간의 언어와 사고를 흡수하며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한글 600년의 역사적 유산은 이제 AI 100년의 미래와 맞닿아 있다. 한글은 단순한 과거의 문화유산이 아니라, 디지털 패권 경쟁 속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언어는 곧 권력이다. AI 시대의 언어 패권은 국가의 기술력과 문화력, 나아가 경제와 외교의 주도권을 결정한다. 한국어 디지털 주권 확보는 단순한 언어 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이다. 공정한 AI 사회는 언어의 공정성에서 시작되며, 말뭉치 혁신과 표준화는 그 첫걸음이다.
이재명 정부는 ‘공정’과 ‘디지털 전환’이라는 국정 철학을 한국어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한글의 600년 역사를 AI의 100년 미래로 확장하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이 언어 패권의 주변부가 아닌 중심부로 도약하는 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기술 투자가 아니다. 언어 주권을 지키기 위한 국가적 결단이다.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이 선언은 더 이상 비유가 아니다. AI 시대의 냉혹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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