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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일본 산업유산박물관과 한국의 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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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5-07-2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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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이치가야에 통계청 자료실과 함께 위치해
메이지유신 시절의 제철 조선 탄광산업 전시
일제강점기 식민지 공업화도 근대화로 봐야할까?

일제 강점기 한반도의 공업화를 근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동경 이치가야에 있는 일본산업유산정보센터를 찾았을 때 이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일본산업유산정보센터는 총무성 통계국 자료실 과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다. 전시관은 별도로 들어가도록 돼 있었다.

“예약을 하고 오셨는지요?”

전시관 입구 접수실에서 이같은 질문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방문예약을 받는 모양이었다. 한국에서 왔는데 예약없이 방문했다고 하자, 매니저한테 전화로 확인을 하더니 입장할 수 있다고 알려왔다. 이곳을 방문한 것은 7월17일이었다. 오영석 동경민단 단장 취임을 축하하는 행사로 동경에 찾았을 때 이곳을 들렀다.

“전시실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돼 있어요.”

이런 말을 들으며, 오디오 가이드를 받아들고는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우리말 오디오 가이드는 없었다. 입구로 들어서자 전시실 벽 한면에 걸쳐 일본 근대화에 역할을 한 인물들의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200명은 될 듯한 사진들로, 외국인들의 얼굴들도 10여명 넘게 보였다. 1850년에서 1910년에 걸친 명치시대 일본의 산업화에 기여한 인물들이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미국 함선 페리호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페리호에 놀란 일본은 서둘러 해군을 창설하고 군함 건조에 들어갔다. 하지만 도쿠카와 막부체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필요했다. 허울 뿐이던 왕을 옹립해 명치유신을 시작했던 것이다.

전시관은 제철과 조선, 석탄산업으로 크게 구분돼 있었다. 산업의 근대화는 제철소를 만들어 생산된 강철로 군함과 대포를 만드는 일로부터 시작됐다. 제철을 위해서는 석탄이 필요했다. 석탄을 캐는 탄광들이 규슈 등지에서 대거 개발됐다. 서양식 함선을 최초로 건조한 곳은 나가사키제철소였다. 명치유신 후 시고쿠 도사번 출신 이와사키 야타로가 중심이 된 하급무사들이 나가사키제철소를 인수해 나가사키조선소로 개명하고 함선을 만들었다. 미쓰비시중공업 그룹의 출발이었다.

2015년 나사사키를 방문했을 때 글로버가든에서 내려다본 나가사키조선소

나가사키제철소는 스코틀랜드 출신 무기상인 토머스 글로버를 초빙해 근대식 함선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나가사키에는 군함도와 같은 석탄 생산 기지도 있어서 제철과 조선에 적합한 곳이었다. 기자는 2015년 나가사키를 찾아, 과거 토머스 글로버가 살았던 곳도 방문한 적이 있다. 일본은 그해 유네스코에 나가사키조선소와 군함도 등을 근대화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당시 글로버가 살던 주택도 관광지로 개방하고 있었다.

“언덕위에 있는 글로버가든에서는 나가사키항이 내려다 보였다. ‘저기 보이는 것이 미쓰비시조선소입니다. 그 옆으로 있는 것이 근대화문화유산에 지정된 크레인입니다. 일본 최초의 전동 크레인이지요.’ 문화관광해설사의 소개다. 글로버정원에는 토머스 글로버 주택 외에도 당시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본근대화를 도왔던 외국인들의 집이 여러 채 보존돼 관광객들을 맞고 있었다. 과연 한국의 발전을 도운 외국인이 없을까? 이들이 살던 집을 근대화문화유산으로 지적하겠다는 생각을 과연 우리도 할 수 있을까?”

기자는 당시 방문 기사를 쓰면서 이렇게 소개한 적이 있다. 동경의 일본근대화산업유산박물관에도 토머스 글로버가 크게 소개돼 있었다. 당시 일본은“철은 국가다”라고 생각했다. 근대화 국가를 위해서는 철 생산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기타규슈에 있는 야하타제철소는 관영제철소로 세워졌다. 규슈지역의 석탄이 용광로를 데웠다. 야하타제철소는 나중에 신일본제철이 되고, 우리의 포항제철도 신일본제철을 모델로 해서 세워졌다.

일본의 석탄산업은 한국인들의 비애가 얽힌 분야다. 당시 일본이 ‘조선인’으로 불렀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곳곳의 석탄탄광에 소속돼 갱속에서 석탄을 캐는 일을 맡았다. 처음에는 모집으로 갔다가 나중에는 징용으로 끌려갔다. 사할린도 일본의 석탄탄광 개발로 한인들이 이주했다.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근대화했다. 근대화하면서 한국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일본은 한반도를 강점했으며, 근대화 과정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이같은 ‘근대화에의 강제 편입’은 한국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된다. 한국 학계에서는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공업화를 두고, 여전히 근대화냐 아니냐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근대화됐다는 측은 뉴라이트 노선으로 이어지고, 아니라는 측은 ‘식민지 반봉건시대’로 규정해 북한의 민족해방 논리로 이어지고 있다.

동경의 일본산업유산정보센터를 빠져나올 때 한 장의 홍보물이 눈길을 끌었다. ‘이번 여름 산업혁명유산을 방문하자’는 내용의 홍보물이었다. 올해 일본 근대화산업유산 유네스코 등록 10년을 맞아 벌이는 이벤트였다. 규슈와 야마구치 지역의 석탄 제철소와 조선소, 이와테현의 철광탄광과 제철소, 시즈오카 니라야마 지역 등이 방문추천지로 표시돼 있었다.

일본 동경의 산업유산박물정보센터를 방문하고 돌아와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문화박물관을 찾았다.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 지배와 팽창을 위해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고 식민조시를 확대하였다. 또한 자금을 동원하고 배분하여 처음에는 농업을, 이후에는 공업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책과 시장의 변화에 잘 적응한 지주와 기업은 성장해갔다. 반문 대다수 한국인은 소작인과 노동자로서 궁핍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과연 우리는 산업유산박물관을 만들면 어디서 시작하게 될까? 식민지 공업화 유산도 근대화유산에 넣어야 할까? 한국이 산업유산박물관을 만들지 못하는 것도 이같은 ‘논란’을 의식해서가 아닐까? 우리는 이같은 일본의 식민지 ‘주술’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식민지공업화'
이종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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