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광복 80년 맞아 가본 광화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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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5-07-28 10:06본문
재외동포들의 해외 진출과 모국 기여 소개 없어

(서울=월드코리안신문) 이종환 기자
“자쓰가리우…”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둘러보다가 한 전시물 앞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일제강점기 경성방직이 생산한 ‘태극성’표 광목 제품광고였다. ‘조선사람 조선광목’이라는 세로쓰기 글 위로 “자쓰가리우…”가 크게 가로쓰기로 적혀있었다.
“아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던 시절의 광고군.”
뛰어쓰기가 없다 보니, “자쓰가리우… ”로 읽은 것이었다. “우리가만든것은우리가쓰자”란 글이었다.
광화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찾은 것은 7월 25일이었다. 외교부에서 퇴직한 강승석 전 중국 우한 총영사를 만날 약속이 있어서 경복궁 인근의 약속장소로 가던 길에 역사박물관을 들렀다. 강 총영사는 퇴직 후 한국외교협회 산하에 있는 마스터상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재외공관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하는 반관반민 성격의 회사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3, 4층 전시실은 특별 전시를 위해 공사 중이었고, 5층이 개방돼 있었다. 5층은 상설전시관이었다. 전시관에는 혼자 오거나 가족끼리 온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상설 전시관은 시대별로 나눠 3개 부문으로 구성돼 있었다.
1부는 1994년부터 1945년까지 시기를 ‘자유, 평등, 독립을 꿈꾸며’라는 제목으로 꾸몄고, 2부는 1945년에서 1987년까지로 ‘평화, 민주, 번영을 향하여’라는 타이틀이었다. 3부는 1987년부터 현재까지를 ‘나-대한민국-세계’라는 이름으로 전시했다.
1부는 198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시작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얼굴이 서두를 장식했다. ‘근대국가를 향한 노력과 좌절’이라는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한국은 문호개방 이후 자주독립의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민(民)은 개혁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1980년대 각계각층의 세력들이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열강의 침탈에 맞서고자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한국은 전쟁터가 되었고,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점령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어 1919년 3.1운동으로 시작하는 코너에는 ‘민의 성장과 민국 선포’라는 안내문 제목 아래 “1919년 3.1운동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출발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민은 자유와 독립을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였고, 곧이어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황제의 나라가 아닌 민의 나라가 되었다…”는 소개가 뒤따랐다.
‘민’이라는 표현에서 역사박물관의 고심이 읽혔다. 백성이라고 하면 왕조 시절의 느낌을 줄 테고, 민중이나 민초라고 하면 진보 색채가 강할 듯해서 굳이 ‘민’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코너에 ‘해외 이주와 민족운동’이 소개돼 있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고국을 떠났다. 가난과 차별, 억압과 모멸 그리고 동경과 희망 등 자신만의 사연을 안고 낯선 곳에 정착해 살아갔다. 조국을 잃어 보호를 받지 못하였으나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며 새로운 삶을 개척해갔다. 또한 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고,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길러냈다.”
이어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들이 소개돼 있었다. 연해주에는 최재형 문창범 김알렉산드라, 일본에는 김문준, 만주지역에는 남자연, 중국대륙에는 이동녕, 대만에 조명하, 몽골에 이태준, 유럽에 서영해, 미국 본토에 임천택 차인재가 올라 있었다.

서재필 이승만 조용만 이상룡 김규식 김구 같은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오르지 않은 것이 궁금했다. 안중근 윤봉길의 이름도 없었다. 어떤 고심으로 선정했을까?
이어 ‘식민지 공업화와 노동자의 성장’이 소개되고, “자쓰가리우…” 광고와 경성방직 공장 등이 소개됐다. 그 뒤로는 ‘친일협력자들’이라고 하여 66명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병역은 국민의 의무 중에 최대한의 의무다. 폐하를 머리로 받들고서 이 몸 충복이 되어 황실을 보필하는 의무이다”라고 쓴 춘원 이광수의 글도 전시돼 있었다.
2부는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편되는 세계정세의 영향과 좌우세력의 갈등 속에서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결국 좌절되었다”는 내용에 이어 6.25가 소개됐다.
그리고 전쟁고아 등 다양한 사진을 배경으로 물동이를 진 여인과 서양인의 구두를 닦는 어린이, 원피스를 입고 양산을 든 젊은 여인 조형물이 실물 크기로 전시된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 한가운데는 ‘UN CLUB’에 ‘외국인전용업체’라고 쓴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전후의 한국 풍경이었다.

이어 ‘민주주의 시련’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이승만 정부의 독재, 4·19혁명, 5.16 군사 정변, 유신헌법 등이 소개됐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도 전시돼 있고, 제3 공화국의 경제개발도 소개돼 있었다.
‘탄광과 병원에서’라는 제목의 전시물에는 파독광부간호사들을 소개했다.
“정부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화확보를 위해 독일(서독)에 주목했다. 독일과의 교섭 이후 1963년부터 독일파독광부 선출위원회를 통해 광부를 선발해 파견했다. 1977년까지 총 7,936명의 광부와 1만723명의 간호 요원이 파견되었으며, 국내로 송금한 금액은 1억153만 달러에 달하였다.”
이 같은 소개와 함께 광부와 간호사들의 장비와 옷, 그들이 쓴 일기장도 전시돼 있었다. 이어 중동건설 진출과 국내에서 벌인 새마을운동, 4H 운동 등도 소개돼 있었다.

‘나-대한민국-세계’라는 큰 타이틀 아래 3부 전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시작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사회 전반에 민주화의 이정표를 세웠다.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 국민기본권을 신장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민주주의 제도가 확고히 뿌리내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노동자와 농민도 삶의 현장과 거리에서 자유와 평등,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요구하는 깃발을 올렸다.”
전시관을 둘러보며, 10년 전 광복 7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찾았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에는 3층부터 5층까지가 모두 상설전시관이었다. 그때의 기사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전시한 상설전시관은 3층에서 5층까지였다. 3층에는 1876년 개항에서부터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의 근대사가 ‘대한민국의 태동’이라는 주제 아래 전시돼 있었다.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의 선포, 국권 상실,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수탈, 3.1운동과 국내외의 독립운동 등이 다양한 자료와 사진, 영상으로 소개돼 있었다.

4층 전시실에는 1945년 광복에서부터 1960년까지의 역사가 ‘대한민국의 기초 확립’이라는 타이틀 아래 소개돼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분단, 6.25 전쟁의 참혹한 실상과 그 어려움의 극복, 초등학교 의무교육 실시 등 전후 새로운 국가를 구축해가는 과정이 전시돼 있었다.
5층은 두 전시실로 이뤄져 있었다. 1961년부터 87년까지가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1988년 이후부터 현재까지가 ‘대한민국의 선진화, 세계로의 도약’이라는 주제 아래 전시돼 있었다. 이 두 전시실에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지난 50여 년의 피땀 어린 역사가 전시돼 있었다. 박정희 정부에서 진행한 경제개발과 산업화, 경부고속도로 건설, 월남파병, 새마을운동, 중화학 입국의 중요한 순간들을 담은 사진들도 눈길을 끌었다.”
이 글을 찾아 읽어보면서 역사박물관도 바뀐다는 생각을 했다. 10년 전의 전시는 경제개발과 산업화를 강조했다면, 지금은 성장의 이면까지 많이 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재외동포들의 모국 기여나 해외 진출에 대한 소개가 없다는 점은 여전히 아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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