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한인사회 기초를 닦은 사람들⑤] 일본 도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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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5-07-25 07:07본문
노령화된 민단과 신정주자의 결속이 과제

(도쿄=월드코리안신문) 이종환 기자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민단중앙회관을 방문한 것은 7월 18일이었다. 민단중앙회관 건물에는 재일민단중앙은 물론 재일한국상공회의소, 재일대한체육회, 재일한국부인회 등 민단중앙 산하기관들이 입주해있다. 민단 동경지방본부, 주일한국대사관 영사부도 함께 있다.
신정주자로 첫 동경민단 단장이 된 오영석 단장의 취임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모임이 신주쿠에서 열려 이 행사에 갔다가 이튿날 민단중앙과 동경민단을 찾았다. 이날 민단중앙회관 8층 대회의실에서는 동경민단 집행위원회, 고문, 지단장, 산하기관장 합동회의도 열렸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이자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은 해다. 재일동포들로서는 뜻깊은 해로, 이 때문에 주일대사관과 민단중앙, 동경민단에서 다양한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다.
8월 15일 광복절 행사는 대표적인 행사의 하나다. 재일민단이 가장 비중 있게 치러온 행사다. 10년 전 광복 70주년 행사는 동경 정치 중심이자 인근에 왕궁도 있는 히비야공회당에서 개최했다. 당시 기자도 참여해 행사를 뜻깊게 지켜본 기억이 있다.
“내년이 재일민단 창립 80주년이 됩니다. 이어 2017년은 동경민단 창립 80주년입니다. 신정주자(뉴커머)로서 첫 동경지방본부 단장을 맡아, 동경민단 80주년사 발간도 이제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동경민단 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오영석 단장은 “임기 중 해야 할 일이 많다”면서 이렇게 소개했다.

오영석 단장은 1952년 대구 출생이다. 패션을 배우러 1983년 동경에 유학해 ‘사이카보(처가방)’라는 한국음식점 체인으로 입지전을 썼다. 동경민단 신주쿠 지단장과 동경민단 부단장을 거쳐 올해 3월 동경민단 단장으로 선출됐다. 동경민단 사상 첫 신정주자 출신 단장이 됐다.
“재일동포사회가 민단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데 앞장서려 합니다. 신정주자 출신인 박재세, 신대영 씨를 동경민단 부단장으로 위촉한 것도 그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동경에는 일제 강점기에 건너온 재일동포들과 현지에서 태어난 2, 3세대들이 있고, 오영석 단장처럼 1980년대 이후로 건너온 신정주자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이들을 뭉뚱그려 ‘자이니치(在日)’라고 부르기도 하고, 올드커머와 뉴커머(신정주자)로 나누기도 한다.
신정주자는 1980년대 이후 일본에 정착한 한국인들이다. 이들은 2001년 ‘재일한국인연합회’를 결성해 ‘한인회’로 활동해오고 있다. 하지만 민단에 가입해 활동하는 인사들도 적지 않다. 박재세 동경민단 부단장도 2009년 5월부터 2년 임기의 재일본한국인연합회장을 지냈다.
동경은 오사카와 함께 재일동포가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동경민단의 역사는 민단중앙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해왔다. 동경민단이 출범한 것은 1947년이었다.

광복과 함께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연맹이 결성됐다. 발족 준비를 거쳐 그해 10월 전국대표 5천여 명이 동경 히비야공회당에 모여 성대한 결성대회를 가졌다. 하지만 재일조선인연맹 중앙이 좌파 일색으로 구성되면서 이듬해인 1946년 10월 1일 개천절에 히비야공회당에서 조선거류민단이 결성됐다. 재일대한민국민단의 전신이었다.
출범식에는 33개 단체 대표와 동포 등 2천명이 모였다. 본부 사무실은 아카사카의 구 일본육군대학에 뒀다가 미 군정의 지시로 그해 12월 와카마쓰의 구 일본경리대학으로 이전했다.
재일민단 발족과 함께 각 지역에서 민단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동경에서는 1946년 12월에 도시마, 이다바시, 네리마에서 첫 지부가 만들어지고 이어 기타 지역에서도 지부들이 발족했다. 이어 1947년 2월 28일 재일거류민단동경본부 출범식이 열렸다. 초대단장으로 변영우가 선출되고, 사무실은 와카마쓰에 있는 민단중앙본부의 사무실 일부를 썼다.
재일민단은 당시 재일조선인연맹에 맞서 재일동포들을 조직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강한 우파 색채를 띠었다. 이 같은 성향은 1990년대 조총련이 약화될 때까지 지속된다.

동경민단 임기는 지금은 3년이지만, 초창기는 매년 새로이 선출했다. 변영우 초대 단장에 이어 2대 서충신, 3대는 다시 변영우, 4대 장인건, 5대 원심범, 6대 정인석, 7대 서병욱, 8,9대 정찬진 등으로 이어졌다. 단장들의 사진은 동경민단에 액자로 걸려있다.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동경을 비롯한 재일동포 사회에 큰 풍파를 일으켰다. 1959년부터 조총련 주도로 재일동포와 가족들을 일본에서 북한으로 이주시킨 사건이다. 조총련은 이것을 ‘귀국사업’이라고 불렀다. 1959년부터 1967년까지 9만 3000명이 재일동포들이 북송됐다.
동경민단은 중앙민단과 함께 북송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제13,14대 김인수 단장 때 시위와 단식투쟁, 북송열차 저지투쟁까지 다양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제15대 김인수 단장 때는 재일한국인 법적지위 요구운동을 벌였고, 16,17대 김기철 단장 때는 한일국교정상화와 함께 재일동포 학생들의 모국방문 운동을 시작했다.
제20대 정동순 단장 때는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적극 지원해 한국에 묘목 보내기 운동을 펼쳤다. 한국과 자매마을도 결연해 묘목과 후원금을 보내는 일도 벌였다. 묘목 보내기 사업 등 모국 후원사업은 21대 김치순, 22대 이채우, 제23대 이진호 단장 때도 꾸준히 진행됐다.
동경의 재일동포사회는 1980년대가 되면서 큰 변화를 맞는다. 민단과 조총련으로 구분되던 한인사회에 ‘뉴커머’가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정주자로 불리는 뉴커머는 한국의 경제 발전과 더불어 일본 진출이 시작됐다. 전에는 주재원이나 유학생으로 왔으나 1988년 한국의 해외여행자유화 조치와 함께 대거 진출이 시작됐다. 지금은 일본 전역에 20만명 이상의 신정주자들이 있으며, 다수가 동경과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신정주자들은 동경에서 2001년 재일본한국인연합회를 결성한 것을 비롯해 오사카와 후쿠오카, 나고야 등 곳곳에 한인회를 결성해 활동을 넓히고 있다. 현재 재동경한국인연합회장은 우에노에서 귀금속가공사업을 하는 김연식 회장이 맡고 있다.

민단중앙회관에서 만난 하정남 민단중앙 기획조정실장은 “일본 내의 동포사회 구성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면서, “재일민단도 이에 맞춰 새로운 변화를 위해 현황파악을 위한 실태조사를 했다”고 소개했다.
“지난해 김이중 중앙단장이 취임하면서 동포사회 실태 파악에 들어갔습니다. 기초적인 데이터를 확보해서 수치로 현황을 파악하고, 발전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입니다.”
재일동포사회 현황 조사 실무를 맡은 하정남 기획조정실장은 민단중앙 사무처에서 오래 활동하고 오공태 중앙단장 시절 사무총장도 지낸 인사로, 재일동포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다.
재일동포로 이뤄진 민단은 귀화와 노령화, 차세대의 민단에 대한 무관심 등으로 약화일로를 걷고 있다. 반면 신정주자들은 진출 역사가 길어지면서 경제력을 강화하고 있다. 신정주자 출신이 동경민단을 이끄는 수장이 된 것이 이를 대변한다. 재일동포들과 신정주자들이 어떻게 결속할 수 있을까? 80년 역사를 지닌 민단의 간판 아래 하나로 뭉칠 수 있을까? 이것이 재일동포사회의 새로운 숙제다.
본 기사는 재외동포청에서 제작지원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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