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한 톨이라도 더불어 나누는 세상의 밀알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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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5-07-24 10:21본문
“쌀 한 톨이라도 더불어 나누는 세상의 밀알이 되겠다”
전흥배 日토메이홀딩스 대표 인터뷰
유압기술로 중견기업의 반열에 올라
“기부와 봉사는 돈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
민단과 한인회 정체성 동일..“통합해야”
- 박철의 기자
- 입력 2025.07.23 13:38
- 수정 2025.07.2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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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향은 경남 진주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딴 마을이다. 집안의 재산이라곤 600여평의 논이 전부였다. 삼시세끼 먹고 살기도 힘들었지만 사형제는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부모님의 교육열이 그만큼 높았던 것. 70년대 전국의 대학가는 학원자유화 및 민주화 열풍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부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동료들은 매일 스크럼을 짜고 연병장을 돌며 거리 투쟁에 나섰지만 그는 나설 수가 없었다. 언감생심, 고향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데모는 꿈도 꾸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창원에 있는 동명중공업에 입사를 했다. 이 회사에서 16년을 보낸 그는 1995년 오사카 주재원으로 나갔다가 2000년 8월 아예 회사를 차렸다. 창업 25년째인 올해 그는 토메이(동명) 홀딩스 산하에 엔지니어링, 토메이 테크, 토메이 에어테크, 아사이제작소, 토메이 팜 등 현재 8개 계열사를 둔 중견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전흥배 토메이홀딩스 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 7월10일 오사카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한국에서 근무할 당시 일본인 기술자들이 들어오면 ‘센세이’,‘센세이’하고 따라 다니면서 묻고 또 묻다 보니 적잖은 짜증을 냈다”며 “이들 기술자들은 해가 바뀌어도 매번 예전에 했던 질문을 똑같이 반복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당시 유압기술은 일본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그는 1995년 ‘영업’과 ‘기술개발’이라는 두 가지 미션을 들고 현해탄을 건넜다. 그러던 터에 IMF외환위기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오사카 사무실이 폐쇄되자 2년을 더 버티다가 기술 하나 믿고 창업에 들어갔다.
그는 “일산이든 국산이든 가리지 않고 유압기계는 물론, 건설과 농업 등 기계 분야의 수출입을 시작하게 됐다”며 “이후 엔지니어로서 자신의 기술을 일본에서 증명해 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 제조업에 뛰어들었다”고 창업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나 막상 회사를 차리고 보니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자본도 부족했지만 업력이 짧다 보니 거래처와의 신용마저 쌓여지지 않아 한마디로 앞이 캄캄했다. 때를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도면을 끼고 즐기면서 거래처와 안면을 트고 소통을 해 나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에게도 희망이 생겨났다.
그는 “일본에서 신용만 있으면 품질이나 납기,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한국처럼 학연이나 지연·혈연 등은 통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정부 규제도 생각보다 심하지 않다는 것. 사업에 탄력이 붙으면서 그는 2013년 중국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는 “중국에서의 프로세스 전체를 교포에게 믿고 맡겼다”며 “그러나 그 교포가 장난을 심하게 쳐 혹독한 대가를 치뤘다”고 회고했다. 정말 “사람이 무서웠다”고 덧붙였다.
중국에서의 비즈니스 과정은 이렇다. 전 사장이 직접 설계한 도면을 중국에 보내면 현지에서 규격에 맞게 펌프를 제작, 현지 기업을 상대로 영업하는 구조다.

그는 “중국에서 품질을 인정받을 때까지 5년은 지나야 한다”며 “현재는 토메이 제품이 입소문을 타면서 앉아서 영업할 만큼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비즈니스 스타일이라며 “즐기되 서두르지 마라”고 당부했다. 돈에 집착하면 오히려 더 큰 악재를 만날 수 있다는 조언이다.
그는 “기업을 하면서 단 한순간도 흐트러져 본적이 없었다”며 “매사 성실과 근면함으로 일관된 삶을 이어왔다”고 강조했다. 언젠가부터 그는 이웃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까지 오사카 한인회를 비롯해 재일본한국인총연합회, 경남도민회 등 크고 작은 단체에서 10년 넘게 자선과 봉사활동을 해온 배경이다.
2023년 재일본한국인총연합회장에 당선된 그는 지난 3월 2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한인단체장을 맡고 있을 때 일화다.
그는 “일본에서 재벌의 반열에 오른 한인 기업의 창업주 아들과 인연이 있어 기부를 요청했으나 답변이 없었다”며 “이때 기부는 꼭 돈 많은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고백했다. “가진 게 없어도 공동체를 돌아보고 이곳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그의 경험담이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동포사회의 열악한 재정을 안타까워했다.
재일동포 사회는 1965년 한일수교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한일수교 이전 세대인 올드커머는 민단을 중심으로, 이후 세대인 뉴커머는 한인회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민단과 한인회는 적잖은 갈등과 반목이 현재도 진행형이다.
이에 대해 전 사장은 “두 단체의 정체성과 지향하는 방향이 크게 다르지 않다”며 “언젠가는 통합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해답은 서로 기득권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했다. 한인단체장을 하면서 차세대에게 느낀 소감을 물었다.
그는 “재외동포들은 헝그리 정신으로 세계 각국에서 차별과 맞서며 터를 잡았다”며 “요즘 차세대들은 이런 헝그리 정신이 조금 부족한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특히 현재의 차세대는 언어와 소통능력 등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의지가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이런 와중에 3년 전 그는 오사카 인근에 논을 2만평 샀다. 의외였다. 일본에서 논을 사면 농사를 지어야 하고, 특히 개인은 논을 살 수 없으며 법인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일본에서는 의외로 농지를 싸게 매입할 수 있다"고 그는 귀뜸했다.
그는 “돈을 벌거나 투기를 위해 산 것이 아니다”며 “어린 시절, 고향에서 논 몇 마지기만 있어도 배가 부르고, 부자라는 느낌이 들어서 샀다”고 말했다. “들판에 익어가는 곡식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한 농부의 이야기가 새삼 다가온다. 지난해에는 위탁농을 했지만 올해는 7000평의 논에서 직접 쌀을 생산하고 있다고 했다. 이미 카레 식당에서 주문을 받아 놓은 상태다.
그는 “요즘 일본에서 갑자기 쌀값이 많이 올랐다”며 “식당에서 필요한 정도만 공급하고 나머지는 어려운 동포들에게 기부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낯선 땅에서 배고팠던 어린 시절의 아픔이 자신을 키웠고, 이제는 쌀 농사를 통해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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