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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 재일동포가 남긴 유산②...서갑호가 남긴 기업가정신과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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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5-07-2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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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 재일동포가 남긴 유산②...서갑호가 남긴 기업가정신과 울림


시가 1조원 주일한국대사관 부지 조국에 기부
하지만 정작, 위기 때 정권은 그를 외면했다
방림방적 설립 등 한국경제발전 주춧돌 역할
석유파동 등 불운 겹쳐 재기 실패...해외출장
후 귀국한 뒤 삼청동 자택서 61세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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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갑호 회장은 현 시세로 1조원에 이르는 대사관 부지를 1962년 8월15일 대한민국 광복절 기념으로 한국정부에 무상 기부했다.서갑호 회장은 현 시세로 1조원에 이르는 대사관 부지를 1962년 8월15일 대한민국 광복절 기념으로 한국정부에 무상 기부했다.

“오사카에서 기업을 일으킨 서갑호 전 회장을 아시지요. 한국의 대사관 부지를 무상으로 기부한 분입니다. 그분의 호(號)가 바로 동명(東鳴)입니다. 동녘 동(東)에 밝을 명(明)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연하게 호에 울 명(鳴)이 들어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멈출 정도로 깜짝 놀랐습니다. 대한민국은 서갑호 회장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동명엔지니어링 등 8개의 계열사를 운영하고 있는 전흥배 전 재일본한국인총연합회장이 지난 7월 10일 오사카 코리아타운을 안내하면서 기자에 남긴 말이다. 아울러 그는 오사카의 또 다른 영웅, 이희건 신한은행 명예회장의 기업가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갑호 회장은 1915년 경상남도 울주군 삼남면에서 태어났다. 당시 14살 소년은 대한해협을 건너 오사카에 도착한 뒤 폐품회수에서 부터 껌팔이, 사탕팔이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때로는 똥장군(화장실 똥이나 오줌을 퍼 담는 용기)메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소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이를 눈여겨 본 일본인이 소개해 간 곳이 오사카 센슈지방에 있는 타월공장 ‘신토(新東)’다. 이곳에서 서갑호는 남다른 성실함으로 베 짜는 기술을 익혔다.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가내수공업 형태의 석면 방적공장을 차렸다.

다행히 석면은 군수물자로 지정돼 만드는 족족 팔렸다. 해방이 된 뒤 1948년 3월 그럴싸한 공장인 ‘사카모토 방적’을 세운데 이어 1950년 봄 가와사키중공업(川崎重工業)을 매입해서 제2 공장을 건설해 ‘오사카 방적’을 설립했다.

그러던 터에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군복 수요가 급증, 공장은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풀가동됐다. ‘사카모토 방적’과 ‘오사카 방적’에 이어 1955년 부도위기의 ‘히타치 방적(日立紡績)’을 인수, 그는 모름지기 그룹의 회장이 됐다. 1961년에는 연간매출 100억엔으로 관서지방 최대의 방적왕에 오른 순간이다.

방적업으로 성공한 서갑호 회장은 부동산, 호텔, 볼링장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1950년도 그의 소득은 1억2000만 엔. 오사카부 고액 소득자 랭킹 1위로 올랐다. 1952년에는 3억 6966만 엔을 달성해 일본 전체 고액 소득자 랭킹 5위에 등극했다.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던 1952년 5월의 어느 날이다. 대한민국 공사가 당시 도쿄에 있던 서 회장을 찾아와 “도쿄 공사관이 작은 빌딩 한 층에 월세로 들어가 있는데, 임차료를 내지 못해 건물주가 나가라며 전기공급을 끊어버렸다”며 하소연하고 돌아갔다.

서 회장은 며칠 전 자신을 찾아온 공사를 대동하고 도쿄의 부촌인 다케야초의 한 건물을 방문했다. 약 2400여 평의 대지에 유럽식 2층 건물로 덴마크 공사관 관저였다. 그는 당시 4200만 엔으로 이 건물을 매입한 뒤 공사관을 이사시켰다. 월세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을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1962년 8월 15일 광복절 선물로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했다.

서갑호 회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주일한국대사관 부지를 대한민국 정부에 기중하고 있는 장면.서갑호 회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주일한국대사관 부지를 대한민국 정부에 기중하고 있는 장면.

이 건물이 지금의 대한민국일본대사관이다. 이듬해인 1963년에는 또 다른 사단이 났다. 오사카 공사관 운영비를 동포들의 성금으로 어렵사리 운영해 왔으나,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공사관을 옮겨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문제는 보증금 2700만 엔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현재 가치로 3000억 원에 달하는 보증금을 서갑호, 한록춘, 안재호 등 오사카의 다섯 동포가 부담했다.

이들은 7년 후 오사카 도심 한복판인 신사이바시의 대지를 매입해 공사관을 새로 짓자고 결의했다. 당시 외교부는 굳이 비싼 곳에 지을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동포들은 “대한민국의 자부심이 걸려 있는 문제”라며 이를 거절했다. 그런데 땅 주인이 구매자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팔지 않겠다고 몽니를 부렸다.

결국 한록춘 씨의 일본인 부인 명의로 매입, 1974년 지상 9층 지하 2층 건물을 완공한 뒤 곧바로 한국 정부에 소유권을 이전했다. 당시 재일동포들이 부담한 금액은 무려 8억 엔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빈손이었다.

서갑호가 남긴 유산은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19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요청을 받고 당시 115억 엔을 투자, 태창방적을 인수한 뒤 방림방적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방적기 14만 추, 섬유기계 4700대의 설비를 갖춘 국내 최대 방적회사로 탈바꿈시켰다.

서갑호 회장이 1951년부터 사저를 주일본대한민국대표부 공관으로 무상 대여했고(사진 좌), 1962년에 기증을 해 국교정상화 후 정식 대사관으로 승격됐다. 2013년 재건축한 주일한국대사관(사진 우)서갑호 회장이 1951년부터 사저를 주일본대한민국대표부 공관으로 무상 대여했고(사진 좌), 1962년에 기증을 해 국교정상화 후 정식 대사관으로 승격됐다. 2013년 재건축한 주일한국대사관(사진 우)

또 1964년에 대구 구미 공업단지에 171억 엔을 투자해서 윤성방적을 설립했다. 두 방적공장 종업원이 4000명으로 일약 한국 방적재벌이 되었다. 장안에 최대의 화제 인물이 됐다. 70년대 초 한국 최초의 수출 공단인 구로디지털 단지 조성을 주도했지만 그의 운명은 여기까지.

1974년 1월 조업 직전 윤성방적 공장에서 대형 화재가 터지면서 서갑호 씨는 궁지로 몰렸다. 그는 공장 처분을 결심하고 투자한 자금을 회수하려고 한국정부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한국정부는 냉담했다. 자금 융통에 실패한 서갑호 회장은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윤성방적의 화재는 일본 사카모토 그룹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석유파동에 주력 사업인 볼링 붐마저 사라져 1974년에 사카모토 그룹은 640억 엔의 부도를 내며 도산하고 만다. 이후 1976년 11월21일 필리핀 출장을 다녀온 뒤 갑자기 서울 삼청동 자택에서 쓰러져 깨어나지 못하고 만다. 그의 나이 61세 때다.

주일한국대사관은 지난해 11월1일 서갑호 회장이 남긴 유지를 받들어 이 날을 '서갑호의 날'로 지정하고 유족들을 초청해 기념식을 개최했다.주일한국대사관은 지난해 11월1일 서갑호 회장이 남긴 유지를 받들어 이 날을 '서갑호의 날'로 지정하고 유족들을 초청해 기념식을 개최했다.

정부는 그의 애국심과 한국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서 회장이 별세한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했다. 이어 지난해 11월 1일 주일 한국대사관은 서갑호(1915∼1976) 회장이 현 대사관 부지를 무상 기증한 날을 '서갑호의 날'로 지정해 유가족을 초청한 가운데 첫 기념식을 개최하는 등 서갑호가 남긴 정신과 유산을 기리고 있다. 

서갑호 회장이 막대한 재산을  조국에 투자해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유산과 울림은 적지 않다.  망국과 가난, 그리고 배움의 한(恨)을 넘기 위한 통곡의 눈물을 안고 신토(新東)에서 꿈을 키웠던 서갑호는 그렇게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동명(東鳴)이라는 호에 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공동기획 : 재외동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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