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지구촌 한글학교, 지원 체계를 다시 설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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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5-07-15 10:07본문

전 세계 47개국에서 한글학교 교사와 교장 240명이 7월 14일부터 19일까지 인천 송도에 모인다. 이들은 매주 주말마다 교실 문을 열고, 해외 한인 차세대에게 한국어와 역사, 문화를 가르쳐왔다. 품앗이와 봉사로 시작된 교육은 이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으로 승화됐다. 단순히 ‘교사’라는 말로는 이들의 헌신과 사명을 담기 어렵다.
한 세기 전, 해외에서 독립전쟁을 벌인 선열들이 있었다면, 오늘날 이들은 다인종·다문화 사회 속에서 민족의 뿌리를 지키는 조용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언어와 문화를 잃는 것은 정체성 해체이자 공동체 붕괴의 지름길이다. “너는 한국인의 후예다”라는 말보다 더 깊은 메시지를, 이들은 한글학교 현장에서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전 세계 116개국 1,464개 한글학교에서 활동하는 교사는 1만4,500명에 달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글로벌 시대 한민족의 정체성 기반은 훨씬 더 빠르게 희미해졌거나 왜곡됐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다수의 2·3세 동포 차세대들은 현지 적응과 주류사회 진입을 이유로 한인 공동체에서 멀어지고 있으며, 한국어 구사 능력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부모-자녀 세대 간 단절은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이해 방식의 괴리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한글학교는 뿌리교육의 최후 보루다. 단순한 언어·문화 수업을 넘어 ‘왜 나는 한국과 연결돼 있는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알아가게 하는 공간이며, 조상이 물려준 지적 유산을 즐겁게 체험하는 터전이다. 한글학교 교사·교장들은 스스로를 ‘21세기 독립군’이라 부르며 오늘도 교실 문을 연다. 다행히 K-컬처의 확산과 함께 순수 외국인 학습자, 다문화가정 자녀, 해외입양·무국적 동포 등 수요도 다양해지며, 한글학교의 교육적 가치도 더 커지고 있다.
재외동포청은 이 같은 교사 초청연수를 매년 주관해왔다. 온라인 사전 연수와 현장 중심 프로그램이 병행되며, 참석자들은 고국의 정(情)을 나누고 동지로서의 연대감을 다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제도적 기반은 여전히 취약하다. 교사·교장의 다수는 자원봉사 수준의 처우를 받고 있다. 운영비 지원 예산도 격차가 크다. 정치·문화적 제약으로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지역도 적지 않다.
특히 재외동포청 설립 이후 정부가 한글학교를 직접 지원하는 구조로 전환되면서, 현지 교육·문화 정서와 충돌하는 문제도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일부 국가는 자국 내 외국계 교육 활동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외국 국적 동포에게 한국어와 문화를 가르치는 일이 자칫 내정 간섭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과거 민간 주도, 정부 간접 지원 방식이 불가피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이제는 이러한 여건을 고려한 보다 정교하고 유연한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한글학교가 ‘한국 국익을 위한 조직’처럼 비춰지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한글학교는 외교 도구가 아니다. 이는 동포 차세대의 정체성 회복과 언어·문화적 뿌리 찾기를 위한 자조적 교육 공간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 현지 사회의 오해를 줄이고, 자율성과 현지 법·제도 존중 속에서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어야 한다. 정부와 동포사회 모두, 한글학교를 새롭게 인식해야 할 때다.
정체성 교육은 구호나 감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국적 중심의 일방적 접근을 넘어, 거주국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세계한인’을 길러내는 중장기 전략이 필요하다. 이는 동포사회의 안정 정착을 넘어, 대한민국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 핵심 글로벌 전략이다. 한글학교 운영을 더 이상 동포사회의 선의에만 의존해서도 안 된다. 공교육 체계 속 국가 공동책임 구조로 전환하고, 법적·제도적 기반부터 재설계해야 한다.
시급한 과제는 다음과 같다. △재외동포기본법 및 시행령 내 한글학교 관련 조항 신설 △재외동포청·교육부·문화체육관광부 간 협업 체계 제도화 △중장기 재정지원 체계 마련 및 전용기금 조성 △이중언어 교사 양성·인증제 도입 및 국내 교육대·사범대·KFL대학원과의 연계 △거점형 학교 모델 및 지역 허브 체계 구축 △입양·귀환동포 맞춤형 교육 및 정서지원 프로그램 운영 △한글학교 출신 장학제도 및 모국 연수 확대 △디지털 기반 통합교육 플랫폼 구축 △한글학교 졸업생 스토리 공모, 백서 발간, 세계한글학교대회 정례화, 교사 공적기록의 체계적 아카이빙 등이다.
한글학교 정책은 단순한 교육지원이 아니다. 글로벌 한민족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세계 속 한국인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국가전략이다. 이런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초국경·다문화 시대, 한국인의 정체성은 ‘국적’보다 ‘삶의 현장’에서 드러난다. 특히 디지털과 AI에 익숙한 한인 Z세대와 알파세대, 그리고 외국 국적자를 상대하는 한글학교 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회성 재교육이나 단기 지원이 아니다. 공감과 연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지속 가능한 소통과 든든한 국가적 버팀목이 절실하다.
언어는 기억이고, 정체성은 미래다. 오늘도 세계 곳곳의 한글학교는 “정체성 교육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온몸으로 답하고 있다. 이제는 국가가 응답할 차례다. 주권과 영토는 되찾을 수 있지만, 언어와 신뢰, 그리고 뿌리는 한 번 잃으면 되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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