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하 이화의료원장, 애틀랜타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서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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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5-04-16 15:11본문
첫 여성병원 ‘보구녀관’이 이화의료원 전신

(서울=월드코리안신문) 이종환 기자
서울 발산역에 있는 이대서울병원의 한켠에는 아담한 전통한옥 건물이 한 채 서 있다. 조선 최초의 여성병원이었던 보구녀관(普救女館)을 복원한 건물이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소개돼 있었다.
“1887년 10월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이자 여성 의학 교육기관으로서,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이화의료원의 전신이다. 스크랜튼 부인은 남성 의사의 진료를 꺼려했던 조선 여성들을 위해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FMS)의 후원을 받아 여성병원을 설립하였고…”
이곳을 찾은 것은 4월 14일 오전이었다. 유경하 이화의료원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제23차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에 유경하 원장이 가서 특강을 하는 것이 계기가 됐다. 세계한상대회로도 불리는 이 대회는 오는 4월 17일부터 19일까지 미국 동남부에 있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린다.

유 원장은 의료 가운차림으로 보구녀관에 나타났다. 진료 중 잠시 몸을 빼서 온 듯했다. 소아청소년과 교수이자 의학박사인 그는 이화여대 의무부총장이자 이대서울병원과 이대목동병원으로 이뤄진 이대의료원 원장을 맡고 있다. 두 병원에 진료도 보면서, 학사업무와 병원경영, 강의와 진료까지 맡으니 여간 바쁘지 않을 터였다.
“어렵사리 시간을 내 애틀랜타에 갑니다. 16일 들어가서 20일 들어오는 일정입니다.”
그는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에서 20분간 특강이 예정돼 있다. 그가 준비한 PPT를 살펴 봤더니, 크게 두 가닥으로 이뤄져 있었다. 하나는 초창기부터 지금에 이르는 이대의료원의 역사였고, 다른 하나는 ‘해외 방문객들에게 가장 따뜻한 병원’으로 이름 붙인 지금의 병원 현황이었다.
이화의료원은 애틀랜타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의 전시회에도 참여한다. 2023년 미 서부 오렌지카운티에서 열린 제21차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에도 참여했다. 대회 주관단체인 미주한인상공회의소총연합회와 MOU를 한 것이 계기였다.

“병원이 자리하고 있는 강서구에서 미라클메디특구를 만들어 발전시키고 있어요. 특구 이름으로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함께 합니다. 이화의료원과 관계가 많은 중소기업중앙회의 김기문 회장님이 이번 대회의 대회장을 맡으셔서 초청을 받았습니다.”
유 원장은 강서구 미라클메디특구 의료 관련 기관들로 이뤄진 협의회 회장도 맡고 있다고 했다. 2020년 이화의료원장을 맡으면서였다.
“우선 빠르게 둘러볼께요.”
유 원장이 보구녀관 안에 있는 방들로 안내했다. 초창기 진료실과 입원실로 사용됐던 방들이었다. 초창기 병원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병원을 이끈 사람들의 사진들이 방들에 전시돼 있었다.

유 원장은 초창기 역사를 꿰뚫고 있었다. 진료 중 나온 탓에 시간이 없어 빠르게 설명했는데, 마치 한국의 근대사를 듣는 것 같았다.
“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남편과 사별하고 51세에 조선으로 선교를 왔습니다. 예일대를 졸업하고 뉴욕의대를 마친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왔어요.”
메리 스크랜튼은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을 만들고, 이화의료원의 전신인 보구녀관을 만들었다. 교육과 의료 그 자체가 선교였다.
문제는 여의사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은 제중원에서 일하다 ‘시병원’을 만들어 진료를 했다. 하지만 조선의 유교 원리주의 사회가 문제였다. 조선에서는 여성들이 남자 의사들의 진료를 받을 수 없었다.

메리 스크랜턴은 미국 WFMS에 이러한 상황을 알리고 여의사 파견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1887년 10월 최초의 여의사 메타 하워드가 서울에 도착했다. 보구녀관이 시작된 날이었다. 고종이 감사를 담아 이름을 하사했다.
처음에는 시병원에서 담을 쳐서 남녀 병원을 구분했다. 첫 10개월간 무려 1,137명의 여성 외래환자가 다녀갔다. 이어 시병원의 한옥 4채 중 한 칸을 독립구간으로 받아 진료를 활성화했다.
진료비는 처음부터 무료였다. 약 담을 병만 들고 오면, 보구녀관에서는 약을 선물로 준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의 환자들은 체면을 알았다. 달걀이나 밤 호두 음식 등으로 감사를 표하곤 했다고 한다.
메타 하워드는 건강문제로 2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가고, 이어 로제타 셔우드가 파견돼 왔다. 당시 감리교 보고서에 따르면 2년간 로제타의 진료는 8천여 건이었다. 로제타는 언청이 수술, 화상환자를 위한 피부이식 수술도 했다. 당시는 ‘신체발부’ 운운하며 상투도 자르지 않으려 하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로제타는 자신의 피부를 떼내 환자에게 시술하기도 했다.

이어 메리 커틀러와 릴리안 해리스가 보구녀관에서 일했다. 드디어 보구녀관에서 배출해낸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나왔다. 박에스더였다. 그는 WFMS의 도움으로 볼티모어여자의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진료했다.
이런 내용들은 말 그대로 우리의 근대사였다. 이 역사를 써 내려간 사람들은 한국을 사랑하면서 인도주의를 실천한 미국 감리교 여성 의료선교사들이었다.
이화학당과 보구녀관을 만든 메리 스크랜턴의 아들이자 의사인 윌리엄 스크랜턴은 의료활동을 하면서 남대문 상동교회도 만들었다. 전염병자들이 버려지던 서대문 밖 아현동에서도 애오개시약소와 아현감리교회를 세웠다. 상동교회는 이회영 이동영 등 독립투사들의 산실이었다. 결국 윌리엄 스크랜턴은 일본의 미움을 사서 조선에서 축출돼 일본 고베에서 외로이 죽음을 맞는다.
유경하 원장은 “윌리엄 스크랜턴의 묘를 찾지 못하다가 100주기 때 가족들이 고베의 외인묘지에서 묘비를 찾아냈다”면서, “어머니와 똑같은 묘비를 하고 있었다”고 얘기했다.

보구녀관을 둘러보며 초창기의 역사를 아주 빠르게 설명한 유 원장은 다시 가볼 데가 있다면서, 병원 본관건물로 이끌었다.
“여기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생각합니다.”
지하 2층까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유 원장이 소개를 했다. 역동적으로 치솟는 계단형 구조가 한눈에 들어왔다. 옆에는 꽃들을 그린 최영훈 전 조선대 미대 학장의 1천 호짜리 대형 작품도 걸려 있었다.
최영훈은 일본 동경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현덕신의 손자였다. 현덕신은 동대문 언덕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 이른바 ‘동대문 부인병원’ 시기의 의사였다. 동대문부인병원은 1945년 광복과 함께 이대부속 동대문병원이 된다.
“동대문병원이 2008년 문을 닫습니다. 그때 서울시에 넘긴 땅값이 1,100억 원이었습니다. 여기에 이자 등이 붙어서 1,600억 원으로 이대서울병원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동대문병원이 재탄생한 것이지요.”

유경하 원장은 이렇게 소개하며, 발산역으로 연결되는 병원 입구의 ‘이대 동대문병원 역사라운지’로 안내했다. 동대문병원 시절의 자료들과 함께 이화의료원의 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쉼터도 있는 이곳에는 이화의료원을 이끌어온 사람들의 감동적인 어록도 곳곳에 전시돼 있었다.
밝게 빛나는 빛의 기둥에는 “작은 도토리에서 큰 참나무가…” 등 여러 어록들이 새겨져 있고, 벽들에도 “나는 낮에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여성들을 위해 저녁에도 진료실을 열고 싶다” 등의 글들이 있었다. 여성 의료 선교사들이 남긴 말이었다.
유 원장은 오는 제23차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에서 이 같은 이화의료원의 역사를 강연한다. 또 ‘해외 방문객들에게 가장 따뜻한 병원’이라는 지금 상황도 소개할 예정이다. 하지만 20분 만에 이 내용들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굴곡진 한국 근대사와 함께 한 이화의료원의 역사와 지금의 모습을 과연 그 짧은 시간에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대서울병원을 빠져나올 때, 유원장은 <이화의료 이야기>라는 책을 건네줬다. 이화의료원의 역사가 정리된 400페이지 분량의 책이었다. 이화의료원이 2022년에 펴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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