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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열아홉 소녀를 울린 천상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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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4-12-1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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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열아홉 소녀를 울린 천상의 소리


김예자 월드킴와 상임고문 인터뷰
60년대 이화여대 재학중 미국 건너가
이민 1세대로서 이타적인 삶의 본보기 보여
국제결혼한 여성들의 구심점으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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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말 서울 인사동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예자(미국명 리아 암스트롱) 월드킴와 상임고문. [황복희 기자]    지난 10월말 서울 인사동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예자(미국명 리아 암스트롱) 월드킴와 상임고문. [황복희 기자]    

지난 10월17일 세계국제결혼여성총연합회(World-KIMWA, 회장 박사라) 회원들의 국립서울현충원 참배는 기자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국제결혼한 세계 각지의 한인여성들이 1년에 한번 고국에 모이는 흔치않은 기회에 특별히 일정을 만들어 호국영령이 잠든 현충원을 참배한 것도 남다르게 보였지만, 참배 내내 그들이 보여준 진지한 태도에서 모국을 생각하는 진심어린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70대 초로의 한 회원은 현충원을 너무도 늦게 찾아온 것에 대해 눈물을 글썽이며 미안한 감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날 월드킴와의 현충원 참배에 동행한 기자는 사진뉴스 정도로 간단하게 게재하려던 마음을 바꾸어 글을 쓰기로 작정하고, 그날의 여정을 사진과 함께 기사로 실었다. <본지 10월17일자 기사 참조>

월드킴와의 토대를 세우고 지금까지도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김예자(미국명 리아 암스트롱) 상임고문은 그날 현충원 방명록 앞에서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런 글을 남겼다.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국가발전에 헌신하겠습니다.”

‘헌신’. 그것도 다른 대상이 아닌 조국에... 팔순을 지난 여인의 글이라고 하기에는 힘이 있었고, 결기가 느껴졌다. 무엇이 작용했기에, 나를 넘고 타인을 넘어, 조국을 향해 이같은 진심을 지닐 수 있는 것일까.

김예자 월드킴와 상임고문을 만나 그의 지나온 삶과 더불어 월드킴와와 인연을 맺게 된 배경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김 고문이 서울에 머물 당시인 지난 10월말 서울 인사동에서의 만남을 통해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내용을 구성했다.

국제결혼한 여성들의 단체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는지 궁금하다.

- 우선 나 또한 국제결혼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재학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 대학에서 회계를 전공하고 MBA를 거쳐 보잉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1975년 30대 초반 쯤이었다.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세운다며 당시 타코마(워싱턴주)에서 자동차로 40분 정도 거리인 포트 루이스에 가서 전도활동을 하라는 요청을 해왔다. 미 육군부대가 있는 지역으로 미국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이 부대 안에 살다가 한달에 한번 밖으로 나와 아파트를 얻어 한국음식을 해서 나눠 먹으며 정(情)을 나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찾아갔다. 1976년 1월 40명 정도가 모인 자리에 그들을 전도할 목적으로 갔는데, 마침 회장선거를 하고 있어 한 여성이 회장으로 뽑혀선 부회장을 임명한다며 좌중을 한번 쓰윽 보더니 나를 지명을 하더라. 당시 그들은 교육수준도 낮고 했으니 내가 좀 배운 티가 나지 않았던가 싶다. 그렇게 해서 하루아침에 부회장이 되고, 한달뒤 2월 모임에 참석을 했는데, 그 자리서 회장이 전임 회장에게 “못해먹겠다”며 사표를 휙 던지고 나가버렸다. 그러자, 전임 회장이 “유(you)”라고 나를 지목하며 “오늘부터 회장”이라고 선언을 하더라. 깜짝놀라 거절했으나 막무가내로 엉겹결에 그 모임의 회장이 됐다.

그 모임이 바로 비영리단체인 ‘타코마 대한부인회’로 18년 6개월간 봉사를 했다. 그러고나서 1994년 6월에 그곳을 떠나 재택 간병 서비스회사(Armstrong In-Home Care)를 설립했다. 12년간 운영하다가 2006년 5월 매각하고 그 해 10월 월드킴와를 발족했다.  

오늘날 전세계 16개국에 40여개 지부와 5000명 회원을 둔 월드킴와로 발전했는데.

- 나는 60년대 대구 경북여고를 나와 이화여대를 진학할 정도로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처음 타코마에서 국제결혼여성들을 봤을때는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거친 면에 당황을 했으나 겪어보니 너무도 순수했다. 겉으론 우악스러웠으나 알고보니 친정이 가난한 등 환경이 그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더라. 무엇보다 인간미가 그렇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국제결혼한 여성들에게 애정을 갖게 됐다. 우선 나는 영어가 돼 보수도 없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일처리를 다해주니 그들도 비아냥대던 처음의 시선을 거두고 인정을 했다. 처음에는 서로 이해를 못하니 ‘죽어도 이 여성들과 같이 못간다’는 판단을 했다. 그러나 기도하고 생각하기를 거듭한 결과, “나는 사회구조에서 혜택을 받은 사람이다. 좋은 부모 만나 좋은 학교 나오고 했으니 배운 사람으로서 사회에 혜택을 되돌려줘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남기로 결정한 것이 오늘에까지 이어진거다.

잘나가던 보잉사를 그만두고 사회사업에 뛰어들었는데.

- 70년대 당시 보잉사가 운영하던 여러 회사 중에서도 컴퓨터 서비스 회사에서 유색인종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매니저인 과장을 달았다. 회사에서 신뢰를 얻어 입사 3년만에 대리도 안거치고 과장으로 승진을 했다. 그런 가운데 70년대말경 미국 정부가 형제초청이 가능한 이민법을 만들면서 한국인 이민자가 크게 늘었다. 그들은 언어가 안되니 법적 문제 등등 해서 자연히 내가 할 일이 많아지고, 당시 미국에 프로보노 프로그램이 있어서 현지 변호사 21명을 설득해 무료로 법률적인 지원을 받게 하는 등의 일을 하다보니 그야말로 ‘죽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빴다. 자연히 고민을 하게 되고 “남의 밑에서 월급받으며 일할 게 아니라 내가 뭔가 만들어내야지”라는 판단을 해서 1984년에 보잉사를 그만뒀다. 그러고 나서 오빠가 냉장고 사라고 준 돈 500달러를 갖고 시애틀 근처 개발하는 땅을 조금씩 사들였다. 그것을 분할해 개발업자들한데 팔기를 여러번 했더니 5년만에 300만달러가 됐다. 운이 좋았고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갈 때라 가능했다.

1994년 재택 간병 서비스 회사를 창업할때 직원 두 명으로 시작했는데 2006년 회사를 매각할때는 3000명으로 늘어나게 성장을 시켰다. 미국은 워싱턴주의 간병서비스가 가장 잘돼 있는데, 워싱턴주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그 당시 미국상공회의소가 주는 ‘올해의 기업인상’을 받기도 했다. 총 1700개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데, 경영철학과 성장성 등을 따져 내가 선정이 됐다. 그때 내 빌보드 사진이 프리웨이에 30일간 걸렸다. 당시 회사를 매각한 이유는 64세가 되어 은퇴를 하려는데 두 아들은 물려받을 생각이 없다해서 미국에서 제일 큰 홈케어 회사에 한가지 조건을 걸고 넘겨줬다. 우리 직원들 구조조정을 못하게 한 것이 유일한 조건이었다.

나는 한번도 직원을 해고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 회사와 맞지 않으면 인맥을 동원해 그 직원에게 맞는 다른 회사를 주선해주었다. 사람을 나무라고 보았을 때 아무리 굽어지고 못생긴 나무라도 그냥 버리기 보다는 화목(火木)으로라도 쓰임이 있다고 여겼다.

지난 10월18일 서울 여의도 글래드호텔에서 열린 '2024 World-KIMWA 세계대회' 축제의 밤 행사에서 세계 각지에서 온 회원들과 고운 한복 차림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김애자 월드킴와 고문(맨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김 고문의 왼쪽은 박사라 월드킴와 회장, 오른쪽은 변철환 재외동포청 차장이다.    지난 10월18일 서울 여의도 글래드호텔에서 열린 '2024 World-KIMWA 세계대회' 축제의 밤 행사에서 세계 각지에서 온 회원들과 고운 한복 차림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김예자 월드킴와 상임고문(맨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김 고문의 왼쪽은 박사라 월드킴와 회장, 오른쪽은 변철환 재외동포청 차장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 회사를 운영할 때 직원들과 유대관계가 참 좋았다. 일에 매여 살다보니 내 가족보다 더 친했다. 사무실 직원이 150명 정도였는데,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파티를 열어주었다. 하와이 왕복 항공권, 호텔권 등을 추첨해서 선물로 주면 다들 너무 좋아했다. 결혼식을 안한 커플이 있으면 결혼식을 올려주고 신혼여행도 보내주었다. 직원들이 대학을 가거나 어떤 기술을 배우거나 교양을 쌓고싶다고 하면 1년에 2000달러까지 수업료를 지원해주었다. 그러다보니 교육열이 높은 우크라이나 등지 출신 직원들은 대학원까지 공부를 마쳐 출세한 케이스도 상당하다. 우리 둘째아들이 내 회사에서 근무하며 경영수업을 받았는데, 내 아들만 수업료를 지원 안했다. 오너가 본인 친척이나 자식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이면 어느 직원이 회사에 충성을 하겠나. 좋은데 있으면 다 떠난다. 한 직원은 혹시 계모가 아니냐고 묻더라.

내가 경영철학이 좀 별나다. 아무래도 사회사업을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본다. 미국은 회사를 매각할 때 전 오너가 최소 3년 이상 뒤에서 그 회사를 뒷받침해줘야 하는 조건을 단다. 나는 3년간 많은 계약 수주를 해주었다. 만약 그 3년간 매출이 떨어지면 매각대금에서 일정비율 다시 돌려줘야 한다.

회사를 운영하던 시절, 시애틀 남쪽에 그린 리버 커뮤니티 칼리지라고 있는데, 주지사가 그 학교 이사로 나를 임명해 1995년부터 5년간 관여한 적이 있다. 그때 가만히 보니, 미국에 장학제도가 많으나 신청자격이 우등생이라야 가능했다. 정작 도움이 필요한 싱글맘 같은 이들은 자녀부양을 위해 일을 하느라 성적미달로 장학금에 접근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장학금뿐만 아니라 사회사업을 할 수 있는 재단(‘LASCO’)을 만들었다. 이사가 나 포함해 9명인데 전직 보사부 장관 등 다들 자선사업을 많이 한 유명인들이다. 2003년부터 장학금을 주기 시작해 지난 22년간 318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장학금 지원의 첫 번째 자격조건은 18세 이하 자녀를 둔 싱글맘, 싱글대디다. 나머지 인종, 성별, 국적, 종교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이런 조건의 장학제도는 미국에서 유일하다.

그 외에도 사회사업을 계속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 노인간병 서비스 회사를 매각하면서 시애틀 남쪽 켄트(kent)에 노인 아파트를 하나 지었다. 공을 많이 들였다. 보통 아파트는 벽이 하나 밖에 없는데, 내가 지은 아파트는 이중벽을 설치하고, 방도 큼직막하게 만들고 전체 공간의 52%를 각종 부대시설로 채웠다. 당구장, 소극장, 모임 용도의 그랜드룸에다 각 층마다 작은 도서관을 구비하고, 또 미용실을 두어 자원봉사자들이 정해진 날에 미용봉사를 해준다. 크리스마스 파티도 내가 비용을 대서 열어주고 추수감사절, 독립기념일 등도 챙겨준다.

55세부터 입주할 수 있는데 미국 각지에서 서로들 들어오겠다고 아우성이다. 관리는 전문경영인이 하고 있다.

미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민 1세대로서 후배들에게 전하고싶은 얘기가 있다면.

-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70% 이상은 미국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민온 1세대들을 보면, 한국교회를 다니며 자기들끼리 어울리다보니 정서적으로는 한국사람에 머물러 있다. 그러다보니 미국 문화에 동화가 안돼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한국식으로 가르친다. 한국사람들 특성상 부지런해 열심히 자녀를 키우긴 하나 그 자녀들이 미국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데 있어 문화적으로 상당히 힘들어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자녀를 도와주는게 아니라 부모들이 편한 방식으로 살은 셈이다. 미국 문화권 안에서 미국과 한국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태도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자녀들 또한 성공을 시킬 수가 있다. 현실에서 우리 애들이 미국식에 동화가 되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사람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살 수 있을지, 그런 측면에서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

미국사회에선 철저하게 미국사람이 되고 집에 와선 철저하게 한국사람으로 살게 하면서, 그렇게 두 문화가 합쳐지는 ‘200퍼센트’ 애들을 만들자는 것이 내 주장이다.

이런 주장이 가장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곳이 바로 월드킴와다. 한국에선 국제결혼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을 혼혈이라고 하지만, 나는 두 문화가 교차하는 200퍼센트 아이들을 세계인으로 만들 수 있는 장본인이 바로 우리 월드킴와 회원들이라고 자신있게 강조한다.

가치관이 이타적이고 독립적이다. 언제, 어떤 계기를 거쳐 형성이 됐는지 궁금하다.

- 개인적으로 큰 영향을 준 두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30여년쯤 미국의 각 분야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비정부기구인 ‘아메리칸 리더십 포럼’의 프로그램에 참가한 적이 있다. 나는 워싱턴주 피어스 카운티 구역에 소속돼 1년간 리더십 공부를 했다. 거기서 강조한 메시지가 “서로 경쟁하지 말고 협동하라”였다. “협력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며 “하나가 되고, 평생 친구가 돼라”, 그러러면 “중론을 모으라”고 가르쳤다.

한번은 프로그램에 참가한 동기 24명이 암벽등반 수업에 참여했는데, 어릴때부터 나는 몸이 약해 운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런데 젊은 남자 교사가 첫 한 발만 내디디면 그 다음은 계속하기만 하면 된다며 나를 아래서 밀어 올려주겠다고 했다. 깜짝놀라 바로 “돈 터치(Dont touch)”라고 말한뒤 올라갔다. 그러니 동료들이 박수를 치면서 응원하고 칭찬하며 인정을 해주었다. 그때 ‘나도 할 수 있다’, ‘바위도 탈 수 있다’는 잠재력을 발견했다. 콜로라도의 춥고 눈이 많이 오는 날씨에 새벽4시경 얼음장 같은 개울물에 한사람씩 뛰어드는 훈련도 받았다.

또 하나는 19살 무렵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고향 대구에 미국 장로교회가 운영하던 동산병원이라고 있었다. 그 병원에 나환자를 돌봐주는 의사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 분에게 나환자 수용소를 가보고싶다는 제안을 하니 어느 여름 한군델 소개해 간 적이 있다. 수용소에 들어가니 그야말로 살이 섞는 듯한 냄새가 나는 가운데 젊은 백인 선교사 한 분이 맨손으로 나환자의 몸에 약을 발라주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나환자들이 찬양을 부르는데, 그건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19살 소녀의 귀에 그 소리는 세상 욕망을 다 내려놓은듯한 천사의 목소리로 울렸다. 너무도 큰 감명을 받았다. 그때 민족에 관계없이 내가 할 수 있으면 봉사를 하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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