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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문종범의 ‘글로벌 한민족 진출사’⑥...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재일동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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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회 작성일 24-12-12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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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문종범의 ‘글로벌 한민족 진출사’⑥...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재일동포(상)


경영학 박사, 전 건국대 교수, 베트남 K-MARKET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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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10여 년간 한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다 IT기업에서 싱가포르, 베트남 법인을 설립했고, 한국 딸기 품종을 미국으로 가져가 최초로 미국농림부에 종자보호권을 등록하며 4년간 캘리포니아에서 직접 딸기 농사를 지었다. 2024년 10월부터 1만여 한국업체가 진출해 있는 기회의 땅 베트남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현대판 노마드(Nomad, 유목민)로 세계를 다니며 직접 접하고 느낀 한민족 글로벌 진출 이야기를 재외동포신문에 연재한다.

문종범 베트남 K-MARKET 사장. 문종범 베트남 K-MARKET 사장. 

‘가깝고도 먼 나라’

우리는 흔히들 일본을 이렇게 표현한다. 거리상으로는 가깝고 정서적으로는 먼 나라라는 의미이다. 이는 한국과 일본의 잊기 힘든 근대사에 기인한다. 그 가깝고도 먼 일본 땅에는 약 80만 명(재외동포청, 2023년 통계 기준)의 재일동포들이 살아가고 있다. 

백제의 왕인 박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주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인 곤고구미(金剛組)도 백제의 후손이 창업하는 등 한국과 일본의 교류 역사는 오래됐다.

1910년 한일강제 병합 이후 조선인의 일본 이주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1920년대 말에는 약 10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거주했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일본이 산업화를 진행됨에 따라 노동력이 필요해 조선인 이주 인구가 더욱 많아졌고, 1940년대 들어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강제 징집과 징용 등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이주하여 1945년 패망 당시에는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수가 2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동포들은 심한 차별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힘든 생활을 했는데, 가장 비극적이고 처참했던 사건은 1923년 9월 1일 관동(간토) 지역에서 진도 7.9의 대지진이 발생해 10만 명의 사상자를 낸 대재앙 때였다. 대지진으로 사회가 혼란하고 공포에 휩싸이면서 ‘조선인이 방화를 저지르고 있다’거나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자경단이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영화로도 잘 알고 있는 군함도와 사도광산 등에는 조선인 징용의 아픈 역사가 담겨있다. 

가토 대지진때의 모습, 도시가 폐허로 변하고 10만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재앙이었다.가토 대지진때의 모습, 도시가 폐허로 변하고 10만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재앙이었다.
강제징용으로 인한 조선인의 피해와 고통을 상징하는 군함도의 모습.

필자는 1996년 여름 일본의 고베에서 교환학생으로 여름학기를 보낸 적이 있다. 미국 대학에서 교환학생을 갔기에 필자를 제외한 학생 전원이 미국인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한자를 알고 그 중 일본어를 가장 잘 하는 필자를 가이드 삼아 고베 일대와 교토와 나라, 히메지 성 등을 다녔었다. 하루는 고베의 산노미아 부근 교자(일본만두)집에서 7~8명의 미국 학생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작은 일본 교자집에 한 무리의 서양인들이 들어오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단 한 명의 동양인이 마치 가이드처럼 보였을 것이다. 우리가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바(Bar)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60대 정도의 신사가 오늘은 외국인들이 왜 이렇게 많으냐며, 필자를 보더니 너는 일본인이냐고 물어봤다.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답하니, 그 분은 필자를 자신의 옆자리로 불렀다. 1945년 광복 이전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그분은 경상남도 출신이라고 하시며 맥주를 한잔 권하셨다. 그리고 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닌다는 얘기를 들으시고 본인은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너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한민국을 일본보다 더 잘 사는 나라로 만드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당부를 하셨다. 그리고 우리 일행들에게 자신이 계산할 테니 먹고 싶은 것을 모두 주문하라고 하셨다. 더치페이에 익숙한 미국 친구들은 어리둥절해 하며 저 분이 왜 우리의 밥값을 계산해 주겠다는 건지 물어봤다. 필자는 으쓱대며 같은 한국인이고 어른이라서 그렇다고 하니, 한국 사람들은 모두가 그러냐며 신기해했다. 미국인 친구들은 처음에는 머뭇거리다 맥주도 시키고 다른 음식도 시키며 즐거운 식사자리를 가졌고, 필자는 그 분과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를 마치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나서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꼭 나라에 애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재차 당부하셨다. 

필자가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지진으로 도시의 시설들이 파괴된 고베의 모습.필자가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지진으로 도시의 시설들이 파괴된 고베의 모습.

아직 생존해 계실지 모르는 고마운 그 분이 건네 준 명함은 ‘아와라 건설 전무, 무로 부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나이에 식민지인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힘든 삶을 사셨지만, 조국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분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만난 재일동포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조국 대한민국을 걱정하고 대한민국의 발전을 소망하고 계셨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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