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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용 前 IOC부위원장의 당부가 이끈 ‘첫 아시안·첫 한인의 길’...김민선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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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6-05-2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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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용 前 IOC부위원장의 당부가 이끈 ‘첫 아시안·첫 한인의 길’...김민선 회장


시어른인 故 김운용 前 IOC부위원장 조언에 뉴욕한인회장 출마
한인회관 두 차례 위기서 지켜내…소송비 200만달러·협박에도 ‘뚝심’
JFK공항 막힌 소녀상 반입·연방의사당 전시 성사…“전쟁 피해 여성 인권 문제”
백악관 역사보존위원회 자문위원 선임…“한인이 갈 수 있는 길은 더 많다”
이화여대·줄리어드 거친 음악가…美 리즈마재단·컨서버토리로 후학 양성 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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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김민선 회장. [황복희 기자] 지난 5월1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김민선 회장. [황복희 기자] 

“선거판에 들어가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

지난 2010년 뉴욕 한인회장 출마를 앞둔 김민선 리즈마재단 회장에게, 시어른인 고(故)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이 건넨 당부다. 매각될 위기에 처한 한인회관을 사수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겁없이’ 선거판에 뛰어든 그는 각오한 것보다 훨씬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러야 했다. 포기하고 싶을 때 마다 시어른의 당부를 되뇌이며 버텼고, 결국엔 한인회장에 당선돼 한인회관도 지켜냈다. 두 차례 소송과정에서 총 200만 달러가 넘는 변호사 비용이 든데다 갖은 협박까지 받았지만, 한번은 세금을 내지않아 경매에 넘어간 것을, 또 한번은 당시 한인회장이 중동계 부동산 투자회사에 급매로 넘긴 것을 끈질기게 싸워 되찾아온 덕분에 뉴욕 동포들의 유일한 자산으로 150만 달러에 구입한 한인회관이 지금은 시세 7000만 달러를 넘는다.

웬만한 남자 못지않은 뚝심을 지닌 김민선 회장을 지난 5월 14일 오후 서울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마주했다. 전남 완도에서 열린 글로벌장보고재단 수상자협의회 10주년 행사에 참석차 고국을 찾은 그를 출국 하루 전에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백악관 역사보존위원회 자문위원에 선임됐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절한 상태라고 했다. 다음은 김 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한국 스포츠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되는 분을 시어른으로 모셨는데. 개인적으로 영향이 있었는지.

“당연합니다. 한인회장 출마 전 서울에 계신 시아버님을 찾아 뵙고 ‘한인회관이 위험하다. 제가 나가서 막지않으면 넘어가게 됐다’고 말씀드렸더니 ‘민선아, 선거판에 들어가면 무조건 이겨야 된다. 그런 각오가 있느냐’고 하셨어요. ‘애들도 있고하니 힘든 일 하지 말라’고 하실 줄 알았어요.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아버님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버텼습니다. 소송이 다 끝나고 한국에 왔을 때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시아버님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하고 바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영어, 독일어, 불어, 스페인어, 일본어까지 직접 이메일을 다 처리하셨어요. 여성도 능력이 있으면 사회에 나가 활동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한인회장(34·35대)을 하는 과정에서도 여러차례 뚝심을 발휘했는데.

“제가 미 동부 최초로 소녀상을 들여왔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제작해 가져왔는데 일본 극우세력이 정치공작을 하는 바람에 JFK공항에서 들여오질 못했어요. 당시 뉴욕 지역 연방 하원의원이었던 캐롤린 멀로니(Carolyn Maloney)에게 이건 외교 마찰을 만들자는 게 아니라 전쟁으로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의 인권을 기억하고 보호하자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얘기해서 미국 교통당국에 연락이 이뤄져 결국 반입이 허용됐습니다. 후세들에게도 이런 고통과 슬픔이 다시 반복돼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박물관에 전시했지만, 박물관에 오는 사람만 보는 게 아쉬웠어요. 그래서 ‘움직이는 소녀상’처럼 더 많은 사람이 보게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최초로 미 연방 의사당에서 소녀상 전시회도 기획했습니다. 이 또한 일본 극우의 로비 때문에 세 차례나 취소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네 번째 시도에선 전시를 하루 앞두고 캔슬이 되어, 미국 워싱턴 D.C.의 연방의회(의사당) 의장실로 쫓아갔어요. 의회 지도부를 향해 ‘나는 오늘처럼 미국 시민권자로서 미국이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미국 의회가 여성인권 하나 못 지켜주냐’고 울분에 차서 소리치곤 집에 돌아왔는데 낸시 펠로시 의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어요. ‘민선, 우리가 너무 잘못한 것 같다. 내일 해’라고 하더군요. 결국엔 성사시켰어요.”

백악관 역사보존위원회 자문위원에 선임됐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곳인가.

“백악관은 대통령 개인 집이 아닙니다. ‘피플스 하우스(People’s House)’, 미국 시민들의 집입니다. 대통령은 잠시 머무는 거죠. 저희는 백악관 역사 보존, 역대 대통령 기록, 인테리어와 유물 관리 등을 논의합니다. 1961년 재클린 케네디 여사가 국민 세금으로 하고 싶지 않다며 만든 조직입니다. 기업과 개인 후원으로 백악관을 유지하고 역사를 보존하는 역할을 합니다.

올해가 미국 건국 250주년입니다. 다문화 국가인 미국에서 소수 인종 가운데 한 명 정도는 자문위원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10개월 동안 인터뷰와 스크리닝을 거쳐 지난해 11월 최초 아시안 자문위원으로 임명됐습니다.”

한인사회 입장에선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우리 한인들이 알고 있는 패러다임으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제한돼 있어요. 정치력 신장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분야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한인들이 ‘우리는 여기까지’라고 스스로 한계를 정해놓는 경우가 있어요. 저는 그 틀을 조금이라도 넓히는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참여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를 대신해서 말해주지 않습니다. 미국 사회 안에서 존재감을 보여주고 ‘우리도 여기 있다’는 걸 알려야 정치인들도 관심을 갖고, 우리 목소리도 반영됩니다. 꼭 정치권만이 아니라 역사, 문화, 교육, 정책 자문 같은 분야에도 한인과 아시안들이 충분히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한인들과 아시안들, 특히 후세들이 ‘이런 포지션도 우리가 진출할 수 있겠다’는 걸 알리는 역할을 했다는 게 더 자랑스럽습니다. 먼저 간 제 길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새로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김민선 회장이 지난 4월30일 열린 백악관 역사자문위원 정기회의에 참석해 발언하는 모습. [김민선 회장 제공] 김민선 회장이 지난 4월30일 열린 백악관 역사자문위원 정기회의에 참석해 발언하는 모습. [김민선 회장 제공] 

현지 한인사회와 동포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보는가.

“한인들이 사회 참여 등 해야 할 일은 별로 안하면서 컴플레인이나 요구만 하니까 거기에서 문제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권리를 행사하려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있는 거예요. 우리가 참여해서 ‘우리도 여기 있다’는 존재감을 알려야 정치인들도 관심을 갖고, 우리도 할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예전에는 언어도 안 되고 교회나 한인회가 굉장히 중요했어요. 구심점 역할을 했으니까. 그런데 이제 2세, 3세들은 영어가 자유롭잖아요. 굳이 한인회를 통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한인회가 점점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어요. 그건 어디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결국 대안은 ‘참여’라고 생각합니다. 한인회가 필요 없어진 게 아니라, 우리가 예전처럼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거예요. 우리가 먼저 참여하고 존재감을 보여야 정치인들도 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동포사회 목소리도 힘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1992년 LA폭동을 계기로 미주 한인사가 전후로 나뉜다고 하셨는데.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우리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합니다. 완전히 바뀐 계기가 LA 폭동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돈 벌고 좋은 집 사고 아이들 잘 키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LA 폭동 때 누구 하나 한국 사람 입장을 대변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저희 시아버님도 늘 말씀하셨습니다. 선배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배워야 한다고. 과거 역사를 잃으면 미래가 없다고 하잖아요. 잊어버리는 게 제일 무서운 거예요.”

최근 완도를 방문했는데. 동포사회가 한국 지역사회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는가.

“작년에 뉴욕에서 장보고한상 수상자 세계대회(장한상 세계대회)를 할 때 그냥 행사만 하지 말고 경제 엑스포를 열자고 했어요. 완도 상인들을 미국 식품업계와 연결했죠. 하루에 1750만 달러 규모 MOU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올해 완도에서 명예군민증도 받았습니다.

동포사회가 단순히 친목 모임이 아니라 한국 지방과 연결되는 다리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선 회장이 최근 완도를 방문해 완도군으로부터 명예군민증을 받은뒤 신우철 완도군수, 장보고 한상 수상자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김민선 회장 제공] 김민선 회장이 최근 완도를 방문해 완도군으로부터 명예군민증을 받은뒤 신우철 완도군수(오른쪽에서 세번째), 장보고 한상 수상자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김민선 회장 제공] 

미주한인이민사 박물관을 새로 건립 중인 것으로 안다. 어떤 취지로 추진하게 됐나.

“우리가 미국에서 성공한 이야기만 남기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잘살게 된 이야기, 돈 번 이야기, 좋은 집 사고 자식 잘 키운 이야기만으로는 이민사를 다 설명할 수 없어요. 우리 이민사에는 아픔도, 희생도 있고, 차별도 있습니다. 또 그것을 견디고 여기까지 온 선배들의 삶이 있습니다. 저는 그걸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한인회 건물 벽을 활용해 작은 박물관부터 시작했습니다. 한인회가 맨해튼에 있다 보니 접근성이 떨어지고 평소에는 공간 활용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박물관을 만들면 사람들이 오면서 한인회도 찾고, 우리 역사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렇게 만든 게 최초의 한인이민사 박물관, ‘목화(MOKHWA·Museum of Korean American Heritage)’입니다.

그런데 박물관이라는 건 계속 확장돼야 하잖아요. 초기·중기·근대·현대사로 나눠 전시를 해왔지만 현대사는 시간이 갈수록 자료가 계속 늘어나는데 공간이 부족했어요. 처음에는 한인들도 ‘정말 박물관을 짓겠느냐’며 쉽게 믿지 못했어요. 처음에는 유품 기증도 잘 안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정말 박물관이 세워지고, 외국인 아이들까지 와서 관람하는 걸 보면서 자기 안방에 모셔두던 유품들을 하나둘 기증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우리 자체 건물이 꼭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민 역사가 시작된 퀸스 플러싱에 자체 건물을 마련했습니다. 과거 뉴욕 최초 한인 의료기관으로 쓰였던 건물을 매입했고, 지금 7층 규모 증축 허가를 받아 공사 중입니다. 건물은 내년 봄쯤 완성될 것 같고, 전시 공간까지 제대로 갖추면 내년 말쯤에는 우리 박물관이 영원히 둥지를 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박물관이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니라 교육 공간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후세들이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뿌리를 잊지 않고 미국 사회 안에서도 자긍심을 가질 수 있고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원래 음악가이자 교육자로 살아오셨는데.

“제 평생은 음악가였어요. 제가 4살 때부터 음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하다가 9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했습니다. 이화여대 관현악과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미국에 와서 줄리어드 음대에서 공부했습니다. 저는 원래 교육자이고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음악이 제 삶의 중심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교육의 길로 이어졌습니다. 1992년부터 롱아일랜드 컨서버토리(Long Island Conservatory)를 운영하며 예술인재를 양성해왔고, 또 리즈마재단(Rizma Foundation)을 설립해 국제 음악 콩쿠르를 만든지 올해로 20년째입니다. 세계 각국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교육 기회를 제공하면서 재능있는 음악인들이 공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 있나.

“저희 집안이 교육과 인연이 깊습니다. 청주대학교를 세운 집안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교육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어요. 아버지가 청주대 총장을 지내셨고, 지금은 오빠 김윤배 총장이 맡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학교를 세우셨고요. 그러다 보니 교육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가 됐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뒤에는 한국에 돌아와 청주대에서 교편을 잡고 음악대학을 맡으라는 권유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국에서 저 나름대로 뭔가를 해보고 싶었어요. 할아버지가 학교를 세웠듯이 저도 제 나름의 교육기관을 미국에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어떻게 보면 교육은 제가 가장 오래 붙들고 살아온 가치입니다. 음악가로 시작했지만 결국 교육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성 리더로서 수많은 어려움을 버텨왔는데,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가.

“솔직히 너무 외롭고 힘들 때가 많았습니다. 혼자 모르는 길을 개척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걸어온 길을 나중에 누군가 따라올 때, 그 사람은 저보다 덜 외로웠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항상 새로운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남들이 이미 다 가는 길보다 아직 한인이 가보지 않은 길, 아시안이 많지 않은 자리에 들어가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첫 아시안, 첫 한인… 그런 것이 저한테는 중요합니다. 그게 저 개인의 타이틀이라기보다 우리 후세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하나의 표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시아버님이 참 앞서가셨던 분 같아요. 역사 속에서 배우라고 늘 말씀하셨거든요. 저는 앞으로도 후배 세대가 ‘우리도 할 수 있겠다’는 길 하나를 열어주고 싶습니다. 누군가 제가 걸어온 길을 왔을 때 저보다 덜 외롭기를 바랍니다.”

김민선 회장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철의 재외동포신문 대표이사와 얘기를 나누는 모습. [황복희 기자] 김민선 회장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철의 재외동포신문 대표이사와 얘기를 나누는 모습. [황복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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